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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앞둔 메르켈의 당부 “민주주의, 그냥 주어지는 것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3일(현지시간) 독일 통일 31주년 '통일의 날'을 맞아 독일 동부 할레시를 방문했다. [AFP=연합뉴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3일(현지시간) 독일 통일 31주년 '통일의 날'을 맞아 독일 동부 할레시를 방문했다. [AFP=연합뉴스]

“분열의 시대에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을 앞둔 앙겔라 메르켈(67) 독일 총리가 3일(현지시간) 던진 메시지는 ‘민주주의와 통합’이었다. 그는 이날 독일 통일의 날(1990년 10월 3일) 31주년을 맞아 동부 작센안할트주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강당에서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했다.
독일 총리실이 공개한 연설문에 따르면 메르켈 총리는 “오늘날 우리는 통일된 조국에서 민주적 자유가 선사하는 기회들의 열매를 누리고 있지만, 동독 공산 독재를 경험한 나 개인으로는 분열의 종식과 민주주의는 언제나 각별한 것”이라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과 함께 살고,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매일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그를 필요로 하는 만큼만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2005년부터 16년 간 ‘무티(Muttiㆍ엄마) 리더십’으로 독일과 유럽을 이끌었던 메르켈 총리는 지난 달 실시된 총선에서 불출마와 함께 정계 은퇴 의사를 밝혔다. 연내 새로운 연립 정부가 구성되면 퇴임할 예정이다. 서구 자유주의 진영이 ‘포스트 메르켈’ 시험대에 오른 가운데 이날 그의 연설은 고별 메시지이자 당부와도 같았다.

메르켈 총리는 이날 “오늘날 우리는 최근 언론의 자유 같이 가치 있는 자산들에 대한 끊임없는 공격을 목도하고 있다”며 “우리는 공공장소에서 거짓말과 허위정보가 분노와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다양성과 차이는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며 “출신, 외모, 신념 때문에 공격 당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건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공격 받는 것이고, 우리 사회의 결속력이 시험에 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독일에서 극우주의자들이 일으켰던 테러와 폭력을 예시로 들었다. 2019년 헤센주 카셀에서 일어난 기독민주당 소속 지역 정치인 발터 뤼브케 피격 사건, 같은 해 동부 지역 할레의 유대 교회당 총격 사건, 지난해 헤센주의 하나우 술집 총기 난사 사건 등을 언급했다.

사회주의 국가인 동독 출신 보수당 정치인으로서 개인적인 소회도 털어놨다. 1954년생인 메르켈 총리는 서독에서 태어났지만, 부친의 목회활동을 위해 동독으로 이주해 줄곧 거기서 자랐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는 동독의 과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이듬해 헬무트 콜 독일 총리를 만나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이런 이력 탓에 그 자신 역시 ‘태생적이지 않고 배워 익힌 독일인 내지는 유럽인’이라는 편견에 시달려야 했다.

2018년 6월 캐나다 퀘벡에서 개최된 주요7개국(G7) 회의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운데 푸른 옷)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에게 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2018년 6월 캐나다 퀘벡에서 개최된 주요7개국(G7) 회의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운데 푸른 옷)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에게 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메르켈 총리는 “동독에서 동독인의 삶을 살았던 1600만 명의 선량한 사람들”은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처했고 막다른 길에 처한 것 같았다”며 “우리가 통일이 된 오늘을 맞은 건 동독에서 모든 것을 걸고 싸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005년부터 네 차례 총선을 승리로 이끌며 연립 정부를 이끌었던 그이지만,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2015년 시리아 난민 사태 때 메르켈 총리는 100만 명의 난민 포용 정책을 폈다가 지지율 하락과 정치적 위기를 맞기도 했다. 메르켈 총리가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난민)위기 상황에서 친절한 얼굴을 대하지 않은 것으로 내가 사과해야 한다면, 그곳은 내 나라가 아니다”라고 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이를 연상시키듯 이날 메르켈 총리는 “내가 생각하는 독일이라는 나라, 통일 독일의 모토는 함께 미래를 만들어가는 나라”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해 코로나19 국면을 가장 어려운 경험 중의 하나로 꼽았다. “독일 30주년을 맞았던 지난해에 전염병으로 인해 정부가 시민들의 자유권을 제한해야 했던 것은 지극히 어려운 결정”이었다면서다.

메르켈 총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2016~2020년) 시절 파리기후변화협약ㆍ이란핵합의 등을 탈퇴하고 무역분쟁을 촉발하는 등 미국의 국제 리더십이 후퇴하는 와중에도 중심을 잡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이 주춤한 사이 유럽을 넘어 서구진영의 리더십을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그는 “통일은 독일에 더 많은 책임을 부여했다”며 “유럽은 우리를 갈라놨던 철의 장막 시절(냉전 시기를 상징적으로 이르는 말)만큼 더이상 세계의 주목을 받지는 못 하고 있지만, 이는 우리 자신 뿐 아니라 이웃 지역의 안정에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도 된다”고 말했다. 유럽연합(EU)의 통합과 안보는 물론 발칸반도와 아프가니스탄ㆍ아프리카 등의 지역 안정에 기여해야 한다면서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는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트럼프의 등장 등 강대국의 이기주의 속에서 메르켈 총리는 민주주의·개방성·자유무역과 같은 전후 세계 질서와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지도자”라며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앞두고 메르켈의 퇴진은 국제 질서의 안정성 측면에서 하나의 구심점이 사라지는 셈”이라고 논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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