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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 가까운 돼지저금통 매다느라, 천장이 찌그러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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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의 미로같은 세트는 강렬한 초록색과 분홍색 사이 파스텔톤을 더해 동화적인 느낌을 의도했다. ‘공포’의 색인 분홍색을 가장 많이 썼다.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의 미로같은 세트는 강렬한 초록색과 분홍색 사이 파스텔톤을 더해 동화적인 느낌을 의도했다. ‘공포’의 색인 분홍색을 가장 많이 썼다. [사진 넷플릭스]

허공에 걸린 투명한 돼지저금통 안으로 쏟아지는 오만원권 돈다발. 게임 참가자들은 옆 사람이 죽는 참혹함에 몸서리치다가도 홀린 표정을 짓는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의 채경선(42) 미술감독은 “황동혁 감독이 갖고 있던 돼지저금통 이미지에서 출발해, 쏟아지는 돈이 또렷이 보이도록 투명하게 만든 뒤 ‘돈이 전부인 세상’을 암시하며 천장에 올렸다”며 “500㎏ 가까이 되는 저금통을 특수 세트장에 올리는 게 까다로웠고, 천장이 찌그러지기도 했다”고 돌이켰다.

채경선 미술감독

채경선 미술감독

세계적으로 폭발적 반응을 얻고 있는 ‘오징어게임’은 세트와 소품으로도 관객의 눈을 사로잡았다. “세트장 가면 사진 찍기 바쁠 정도”(이정재), “세트장에 들어가는 순간, 판타지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정호연) 등 배우들이 나서 극찬했다. 이를 만든 채경선 미술감독은 “다음에 어떤 게임을 할지 모르는 궁금증을 자아내려 매번 배우들에게도 세트를 비공개로 유지했다”며 “첫 세트 촬영이었던 숙소 씬에서, 456명 배우가 들어올 때마다 탄성을 내뱉는 걸 보면서 뒤에서 입꼬리가 막 올라갔다”고 했다.

그가 만든 세트는 살벌한 게임 전개와 대비되는 동화적인 분위기, 70~80년대 한국의 정서에서 비롯된 디테일이 두드러진다. 의미도 뚜렷하다. 가면을 쓰고 분홍색 옷을 입은 게임 진행자들, 초록색 체육복을 입은 참가자들 사이는 파스텔톤 공간으로 메웠다. 채 감독은 “참가자들에게는 ‘핑크’가 억압과 공포의 컬러라 미로 같은 공간에도 ‘핑크’를 가장 많이 썼다. 이후 노랑색, 하늘색, 민트색으로 동화적 색감을 더했다”며 “미로가 워낙 복잡해 어디에 무슨 색을 칠했는지 헷갈리는 바람에 몇 번이고 다시 작업한 적도 있다”고 전했다.

‘돈이 전부인 세상’을 암시하기 위해 돈다발이 떨어지는 투명 돼지저금통을 세트 천장 높이 매달았다. [사진 넷플릭스]

‘돈이 전부인 세상’을 암시하기 위해 돈다발이 떨어지는 투명 돼지저금통을 세트 천장 높이 매달았다. [사진 넷플릭스]

반면 ‘구슬치기’ 게임 전 파트너를 정하는 대기공간은 흰색. “천국 같은 느낌을 내면서, 다음 게임 준비 과정에 ‘아무 정보도 주지 않을 거야’라는 의도를 담았다”며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은 채우려는 욕심이 있어 화이트만 쓰는 걸 처음엔 반신반의했는데, 용기 내 선택하길 잘했다”고 전했다.

게임 탈락자, 즉 사망자를 실어나르는 관은 아예 분홍색 리본을 단 선물상자처럼 꾸몄다. 채 감독은 “처음엔 단순한 나무 관으로 시작했는데, 뭔가 밋밋했다”며 “게임을 설계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게임에 참가하고 죽는 것까지도 ‘다 너희에게 주는 선물이야’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고안했다”고 설명했다. 지하동굴 같은 화장장은 개미굴에서 따왔다. 황동혁 감독이 개미 집단에서 ‘가면 인간’들의 계급사회를 떠올린 것의 연장이다.

가면에 그려진 문양이자 오징어게임의 상징이 된 ‘○△□’ 도형은 채 감독과 황 감독이 논의해 정했다. 채 감독은 “동그라미는 꼭짓점이 0개, 세모는 꼭짓점 3개, 네모는 꼭짓점 4개로 각각 권력을 나타내는 도형으로 표현하자는 건 황 감독님의 아이디어”라고 했다.

첫 번째 게임 속 등장하는 거대인형은 교과서에 많이 등장하는 ‘철수와 영희’ 캐릭터에서 따왔다. [사진 넷플릭스]

첫 번째 게임 속 등장하는 거대인형은 교과서에 많이 등장하는 ‘철수와 영희’ 캐릭터에서 따왔다. [사진 넷플릭스]

채 감독은 “국내에서 쓸 수 있는 가장 큰 세트장 3~4곳을 장기간 빌려 촬영했다”며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며 웃었다. 과거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철수와 영희’에서 따온 커다란 ‘영희’인형, 미끄럼틀과 지구본 등을 거대한 공간에 배치해 70~80년대 학교 운동장 느낌을 냈다. 1화 마지막에 하늘 뚜껑이 닫히며 세트가 변하는 것에 대해선 “참가자들이 ‘게임을 하러 온 거지, 죽으러 온 게 아닌데?’ 하며 현실인지 진짜인지 헷갈리는 와중에 ‘우리만의 세상으로 온 거야’라는 공포심을 주는 장치”라고 설명했다.

80년대를 재현한 구슬치기 세트장은 황동혁 감독이 살았던 서울 쌍문동을 많이 참고했다. 채 감독은 “우유배달 주머니, 현관 등, 연탄재까지 재현했다. 타일, 문, 창살 등을 직접 제작하는 데만 두 달이 걸렸다”며 “잘 보면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없다. ‘문’밖에 없는 연극적인 공간”이라고 전했다.

시리즈의 첫인상을 결정한 숙소 세트는 ‘버려진 사람들이 어디로 갈까?’라는 생각을 하던 중 떠오른 터널에 기초했다. 여기에 대형 마트에서 층층이 물건을 쌓아놓은 것처럼, 침대를 쌓아 끝없이 올라가야 하는 욕망사회·경쟁사회를 표현했다. 시청자들이 찾아낸 ‘벽 속에 숨겨져 있던 전체 게임’ 그림은 “터널 안 안내표지처럼, 장식이나 픽토그램을 그리려고 하다가 게임을 그려 넣은 것”이라며 “골목길 세트 문패를 비롯한 곳곳에 ‘○△□’를 숨겨뒀다”고 했다.

채 감독은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공간 설명이 없었다”며 “저에겐 ‘삶과 죽음을 오가는 어른들의 게임, 이걸 어떻게 펼칠 거야?’하는 질문 같은 시나리오였다”고 전했다. 이후 일러스트, 판화, 현대미술, 건축 등 장르를 섭렵하며 새로운 공간을 그려봤다고 했다.

대학에서 무대미술을 전공한 그는 2010년 ‘조금만 더 가까이’로 상업영화 작업을 시작했다. 2011년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 2015년 ‘상의원’으로 대종상 미술상을 받았다. 황 감독과는 ‘도가니’(2011) ‘수상한 그녀’(2013) ‘남한산성’(2018) 등을 함께했다. “부모님이 영화를 너무 좋아해 영화미술을 하게 됐다”는 그는 “쏟아지는 관심은 뜻밖이고 행운이다. 새 장르의 작품을 늘 새롭게 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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