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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배달기사vs주민 갈등…이번엔 다르다 '안전할 권리' 충돌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30일 오후 1시쯤 초등학생들이 인천 송도의 한 아파트 입구에 설치된 볼라드를 넘어 하교하고 있다. 심석용 기자

지난달 30일 오후 1시쯤 초등학생들이 인천 송도의 한 아파트 입구에 설치된 볼라드를 넘어 하교하고 있다. 심석용 기자

“1층에선 세대 호출이 되지 않습니다. 지하를 이용해주세요”

지난달 30일 오후 인천 송도의 A아파트. 오토바이를 타고 출입구에 도착한 배달기사는 지하주차장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 아파트 1층에선 세대 호출을 할 수 없다. 최근 아파트 관리사무소가 해당 기능을 없앴기 때문이다.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배달 기사들이 오토바이를 몰고 아파트 통행로를 오가면서 주민들이 위협받는 일이 많아졌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최근 인천의 한 아파트가 배달 오토바이의 지상 출입을 금지하면서 입주민과 배달기사 사이에 갈등이 불거지고 있다.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입주자회의)가 ‘지하 배달 의무화’를 선언하자 일부 배달기사들은 배달 거부에 나섰다. 양측이 내세운 ‘안전할 권리’가 서로 엇갈리는 가운데 아파트 측이 지하주차장 내 배달 여건을 개선하겠다고 해 합의점을 찾을지 관심이 쏠린다.

“배달 오토바이에 주민 안전 위협”

A아파트 지상층 출입구에 1층에서 '세대호출이 되지 않는다'는 알림판이 붙어있다. 심석용 기자

A아파트 지상층 출입구에 1층에서 '세대호출이 되지 않는다'는 알림판이 붙어있다. 심석용 기자

총 2100여 가구가 사는 A 아파트 단지 지상엔 보도블럭으로 구성된 통행로가 있다. 아파트 건립 초기부터 차량 통행은 원칙적으로 금지됐다. 소방차, 택배 차량 등에만 예외적으로 통행을 허용한다. 주민들은 배달 오토바이가 빈번히 이 통행로를 이용했다고 입을 모은다. 배달시간을 단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배달 주문이 늘자 통행로 이용 빈도가 늘었고 덩달아 오토바이가 어린이 등 약자를 위협하는 경우도 많아졌다는 게 주민들의 말이다.

배달 기사가 A아파트의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와 세대호출을 한뒤 배달하고 있다. 심석용 기자

배달 기사가 A아파트의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와 세대호출을 한뒤 배달하고 있다. 심석용 기자

주민들 우려가 커지자 입주자회의는 올해 초 정문과 후문을 제외한 아파트 출입구에 볼라드(Bollard·차량진입억제용 말뚝) 설치를 결정했다. 이륜차의 지상층 출입을 막아 주민들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일부 배달기사가 볼라드를 넘어 통행로를 이용하는 사례가 발생했다. 지난 4월엔 배달 오토바이와 주민 김모(40대·여)씨가 쥐고 있던 강아지의 목줄이 엉키면서 강아지가 눈 주변과 배 등에 타박상을 입는 일이 일어났다. 결국 입주자회의는 한 주민의 제안대로 외부인이 1층 현관에서는 세대호출을 못 하도록 했다. 지상층에서는 경비실 호출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안전할 권리 위해 배달거부”

A아파트는 출입구의 차단바 길이를 3m에서 2m로 줄였다. 배달 오토바이의 시간 단축을 위해서다. 심석용 기자

A아파트는 출입구의 차단바 길이를 3m에서 2m로 줄였다. 배달 오토바이의 시간 단축을 위해서다. 심석용 기자

아파트측 방침에 반발한 배달기사들은 지난달 27일부터 배달대행업체와 함께 A아파트 배달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배달 종사자의 ‘안전할 권리’를 침해한다는 이유에서다. 배달 종사자 노조 관계자는 “오토바이는 지하주차장의 경사로나 우레탄 재질 바닥에서 사고위험이 크다”며 “사고가 나면 배달 노동자가 피해를 떠안아야 하므로 지하주차장 이용을 꺼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라이더들을 상대로 안전운행 서약 캠페인을 하고 있다”며 “배달 라이더에게 지하주차장 통행을 강제하며 위험을 전가하는 아파트측 행동은 상식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현재까지 배달기사 180여명이 배달거부에 동참한 상태다.

A아파트는 최근 아파트 입주민을 상대로 한 안내문에서 지상층을 절대 이륜차에 개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사진 A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제공

A아파트는 최근 아파트 입주민을 상대로 한 안내문에서 지상층을 절대 이륜차에 개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사진 A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제공

입주자회의 측은 “지상층을 배달 이륜차에 절대 개방할 수 없다”면서도 배달 여건 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단 입장이다. 배달원의 시간 단축을 위한 조치가 대표적이다. 아파트 출입구에 있는 차단 바 길이를 3m에서 2m로 줄이기로 했다. 차단 바를 올리지 않아도 오토바이가 지나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한 배달기사들이 지적한 지하주차장 이중 주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속에 나서기로 했다. 비가 오는 날엔 지상 배달도 가능하다. 배달기사 측은 “아파트 단지와 협의해 단지 내 속도제한과 오토바이 진행통로구역 지정 등 현실적 방안을 논의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일각에선 이번 사례를 앞선 아파트와 배달기사 간 갈등과 다르게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최근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일반 택배 차량의 차체가 지하 주차장 진입 제한 높이인 2.3m보다 높은데도 아파트 측이 지상 통행을 금지해 논란이 일었다. 이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번 갈등은 양측의 ‘안전할 권리’가 충돌한 것으로 보인다”며 “법적 문제보단 자치규약을 둘러싼 사안인 만큼 양측이 문제점을 인식하고 조율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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