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혜 외교안보팀장의 픽 : 북한의 종전선언 갑질
참 이상한 일이다. 3년 전만 해도 이쪽은 “그냥 줄까, 대가를 받고 줄까”를 갖고 집안싸움이었고, 저쪽은 “약속해놓고 왜 빨리 안 주냐”며 골을 냈다. 그런데 지금은 저쪽에서 “받아주길 원한다면 내가 원하는 조건부터 이행하라”며 배짱이고, 이쪽은 “얼마나 주면 되냐”며 조건을 맞춰보려 한다. 종전선언 이야기다.
시계를 마이크 폼페이오 전 미 국무장관이 고위급 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던 2018년 7월로 돌려보자. 북한은 회담 직후 외무성 대변인 명의의 담화를 냈다.
“미국 측이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을 들고 나왔다. 이미 합의된 종전선언 문제까지 이러저러한 조건과 구실을 대면서 멀리 뒤로 미뤄 놓으려는 입장을 취했다. 종전선언을 하루빨리 발표할 데 대한 문제로 말하면 근 70년간 지속돼온 조선반도의 전쟁 상태를 종결짓는 역사적 과제다.”
이때 한ㆍ미는 종전선언의 ‘몸값’을 고민했다. 비핵화 협상을 시작하며 신뢰 구축을 위해 선물처럼 그냥 줘버리자는 쪽과 북한의 비핵화 조치에 대한 대가로서 제공하자는 쪽 사이에 입장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북한이 선심 쓰듯 종전선언이 “흥미 있는 제안”이고 “좋은 발상”이란다.(9월 24일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부부장 담화)
여기에 더해 “종전을 선언하기에 앞서 서로에 대한 존중이 보장되고, 타방에 대한 편견적인 시각과 불공정한 이중적인 태도, 적대시 관점과 정책들부터 먼저 철회돼야 한다”고 조건까지 건다.(9월 29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
“우리를 겨냥한 합동 군사연습과 각종 전략무기 투입을 영구 중지하는 것으로 대조선 적대시 정책 포기의 첫걸음을 떼야 한다”고 가이드라인도 친절하게 제시했다.(9월 27일 김성 주유엔 북한 대사 유엔총회 연설)
3년 전에는 한ㆍ미가 그냥 줄까 말까를 고민했는데, 이제는 북한이 값을 매긴다. 전제 자체가 잘못됐고, 판 자체가 거꾸로 뒤집어졌다.
그 사이 한반도 안보 상황이 달라진 것은 없다. 오히려 북한은 핵ㆍ미사일 능력을 고도화했는데, 평화 정착을 위한 종전선언 문제에서 ‘갑’이 됐다. 무슨 짓을 해도 끝없이 종전선언을 제안받다 보니 ‘갑질’을 해도 되겠다고 판단한 걸까.
1일 국회에서 열린 외교부 국정감사에서도 이와 관련한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조태용 국민의힘 의원이 “북한이 얼토당토않은 조건을 건다면 종전선언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국민에게 해야 한다”고 지적하자,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전 생각이 다르다”고 했다.
조 의원이 “북한 생각이 달라도 계속 추진하겠다는 것이냐”고 되묻자 “그렇다”고 했다. “북한이 조건부로 긍정적 반응을 보인 것으로 보고, 이를 기초로 북한과 협의하겠다”고도 했다.
정 장관은 북한의 조건에 대해서는 “이중기준 적용을 중단하라는 김여정의 담화는 북측의 일방적 주장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우리나 미국은 북한에 대해 적대적 정책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다만 “(북한이 요구한)상호 존중, 보장 같은 것은 국가 간에 관계를 맺을 때 기본적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이 내건 조건 세 가지 중에 이중기준 및 적대시 정책 철폐 등 두 가지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상호 존중이라는 한 가지는 수용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상대방이 100을 요구하면 우리는 0에서 시작해야 겨우 50 언저리에서 합의되는 게 협상이다. 상대방이 셋을 요구하는데 처음부터 “하나는 들어줄 수 있다”고 시작하면, 상대는 다음에는 넷을 요구하거나 셋을 다 들어주지 않으면 파투를 내겠다고 위협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3년 전엔 우리가 100을 요구하고 상대가 0에서 버티는 상황이었다. 갑질은 나쁘지만, 그게 스스로 을을 자처한 결과라면 할 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