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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영국의 주유 대란, 누구나 예견했던 사태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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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6호 31면

김세정 SSW 프래그마틱 솔루션스 변호사

김세정 SSW 프래그마틱 솔루션스 변호사

지난 금요일, 지나는 길에 보이는 주유소에 평소보다 차들이 많다 싶더니, 토요일에는 줄이 더 길어졌다. 일요일이 되자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주유할 수 있으면 다행이고, 결국 기름이 다 떨어졌다는 소리를 듣고 다른 주유소를 찾아 나서고, 그리고 거기서도 매한가지인 소리를 듣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혹시나 해서 주유소를 향해 길게 늘어서 있는 차들 때문에 길이 막히고 버스 정류장이 폐쇄되기도 했다. 심지어는 기다리던 사람들끼리 싸움도 벌어졌다고 한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등교를 못 하는 학생들과 출근을 못 하는 교사들 때문에 원격 수업을 할 수 있다는 안내 메일을 보내왔다. 다시 재택근무로 전환한 직장들도 있었다. 이번에는 코로나 때문이 아니다. 차에 넣을 연료를 구하지 못해서다. 지난 주말 영국을 강타한 연료 부족 사태의 풍경이다. 연료가 부족하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차량의 연료로 쓸 수 있는 기름은 충분히 많다고 하기 때문이다. 생산량도 충분하고, 정유소들도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고, 심지어 수입조차 원활하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운송이다. 생산되고 정제된 기름이 배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시작된 원격수업·재택근무
코로나 아닌 연료 공급 부족 탓
기름은 넘치는데 수송기사 없어
외국인 노동문제 한국은 괜찮나

이는 주로 기름을 운반할 수 있는 초대형 트럭을 운전할 수 있는 숙련된 운전자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초대형 트럭을 운전하는 것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니 특별한 면허가 필요한데, 게다가 여러모로 힘든 직업이다. 이처럼 힘든 일은 영국에서도 상당 부분 외국인 노동자들의 몫이었다. 영국의 경우는 동유럽에서 온 인력이다. 영국이 유럽연합(EU)을 떠나기로 결정한 브렉시트 이후, 이들의 상당수가 영국을 떠났다. 영국이 EU의 일원일 때는 비자 등의 법적 문제가 많지 않았지만 브렉시트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게다가 코로나 사태가 겹쳤다. 즉, 숙련된 초대형 트럭 운전 인력이 부족할 것이라는 지적은 꾸준히 있었다.

선데이 칼럼 10/2

선데이 칼럼 10/2

운송 문제로 영국 내 주유소에 공급되는 차량 연료가 부족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정부 회의에서 나왔다. 이 내용이 회의에 참석했던 누군가에 의해 언론에 제보되었다. 언론이 이런 우려를 보도하자, 이를 본 사람들이 연료 부족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걱정하던 사람들이 아직 필요하지 않은데도 슬금슬금 연료 탱크에 기름을 채우러 주유소로 몰려들었다. 주유소에 늘어선 줄을 본 다른 사람들도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그 대열에 합류했다. 소위 패닉 바잉(panic buying)이 벌어진 것이다. 평시보다 지나치게 많은 수요가 있자 가뜩이나 공급이 아슬아슬했던 연료가 급속히 고갈되었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정말로 심각해진다. 등교하지 못하거나 출근하지 못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앰뷸런스가 움직이지 못할 수도 있고, 소방차가 출동하지 못할 수도 있고, 의사나 간호인력, 조력이 매우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가야만 하는 사람들이 이동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고 죽는 일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패닉 바잉을 자제하자는 사회적 움직임이 있고, 한 사람이 주유할 수 있는 금액을 제한하는 조치가 취해지고 있고, 영국 내 연료가 충분하다는 반복적인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고, 핵심인력이 먼저 주유할 수 있는 권한을 갖도록 하려는 방안을 마련하려고 하고, 심지어 군대를 투입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고 하니, 이번 사태가 조속히 정리되기를 바랄 뿐이다.

다만 문제는 영국 사회가 또 한 번 크게 흔들렸다는 점이다. 패닉 바잉은 팬데믹 초기에도 한 차례 벌어진 바 있다. 빵과 계란과 우유 같은 생필품과 화장실 휴지를 구하기 어려웠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느낀 불안감이란 엄청났다.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쓰러지고 죽어 나가는 한편으로는 슈퍼마켓의 선반이 텅텅 비어 있는 것이다. 안정적인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사태가 벌어진 데는 여러 원인이 있겠으나, 그중 운송 인력의 부족과 그로 인한 물류 대란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예견된 사실이다. 그에 대한 영국 정부의 대응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코로나 와중에 패닉 바잉을 겪은 바 있는 영국인들이 정부를 믿지 못하고 다시 나선 데 대해 개인들만 탓할 수는 없을 듯하다.

영국 시장 규모는 세계 다섯 번째라고 한다. 아직은 한국보다 순위가 높다. 그런 나라에서, 저장하고 있는 연료가 충분함에도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보며, 타산지석이나 반면교사로 삼을 부분이 있을 것이다. 더구나 한국 역시 여러 분야에서 외국인 노동 인력에 의지하는 비율이 높아가는 참이다. 이유가 무엇이 되든 이들이 한국에서 일하지 못하게 될 경우 생산, 공급, 유통이 삐거덕거릴 분야가 많다는 이야기다.

영국 정부는 뒤늦게, 외국 국적의 초대형 트럭 운전자들 5000명에게 특별 단기 비자를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부족한 운전자의 수는 10만 명이라고 한다. 관련 업계에서는 ‘언 발에 오줌 누기’라는 지적이 나왔고, 외국인 운전자들의 반응은 그런 처우 수준으로는 영국으로 가지 않겠다는 거였다. 한국 내 외국인 노동자의 처우는 어떤가. 역시 지금 생각해 봐야 할 지점이다. 문제가 생긴 뒤 수습을 하는 것은 훨씬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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