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중공, 무전기 압수 거부한 선양 미국 총영사 워드 추방

중앙선데이

입력 2021.10.02 00:21

업데이트 2021.10.02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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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6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96〉

1949년 12월 중순, 귀국 중인 선양 총영사 워드 부부와 영사관원들. [사진 김명호]

1949년 12월 중순, 귀국 중인 선양 총영사 워드 부부와 영사관원들. [사진 김명호]

1948년 11월 8일, 중공이 임명한 신임 시장과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선양(瀋陽) 주재 미국 총영사 워드는 기분이 좋았다. 다시 만나기로 한 시장 측에서 연락이 없어도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영사관 앞에 행인들이 자유롭게 오가고, 이상한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영사관 담에 군사관제위원회(군관회) 선전원들이 정치 선전화를 그리자 시장 앞으로 공문을 보냈다. “영사관은 미국 정부의 재산이다. 벽에 인쇄물이나 선전화 그리는 행위를 막아주기 바란다.” 벽이 말끔해지자 난징(南京)에 있는 미국대사 스튜어트와 국무부에 전문을 보냈다. “중공은 우리와 정상적인 왕래를 바라는 눈치다. 우리를 인정하는 의도가 감지된다.”

신임 선양시장은 워드와 우호적 대화

베이핑(北平) 입성 전 마지막 전선지휘부 시바이풔 시절의 마오쩌둥. [사진 김명호]

베이핑(北平) 입성 전 마지막 전선지휘부 시바이풔 시절의 마오쩌둥. [사진 김명호]

11월 15일 오전 10시, 중공야전군이 국민당 군에게서 노획한 지프가 영사관에 도착했다. 군관회 참모라고 신원을 밝힌 청년이 워드에게 공문을 전달하고 돌아갔다. “군관회의 허락을 받지 않은 중국인과 외국인을 포함한 기관들은 현재 소유 중인 무전기와 관련 장비를 36시간 후, 16일 밤 10시까지 군관회로 제출하기 바란다.” 워드는 태연했다. 무전시설은 미국정부 재산이었다. 군관회의 통보를 무시해버렸다. 규정시간 1시간 전, 젊은 참모가 다시 나타났다. “명일, 17일 오전 10시 직접 군관회에 와서 무전기 문제를 설명하기 바란다.” 군관회의 변덕은 계속됐다. 17일 오전 9시 워드는 다시 이런 통보를 받았다. “18일 오후 3시로 시간을 변경한다.” 워드는 군관회의 갈팡질팡에 자신이 생겼다. 18일 오전 국무부가 보낸 전문도 워드의 확신을 부추기는 내용이었다. “영사관과 외교관에게 주어진 권리와 특권을 견지해라.”

제시간에 나타난 워드를 군관회 부주임 겸 위수사령관 우슈촨(伍修權·오수권)이 상대했다. “우리가 보낸 문건 받았으리라 믿는다. 지금 선양은 군사관제 기간이다. 용도와 소속을 막론하고 무전기는 사용할 수 없다. 준행(遵行)하기 바란다.” 워드도 할 말이 있었다. “영사관의 존재를 훼손시킬 수 없다. 무전시설이 없으면 대사관은 물론, 국무부와 연락할 방법이 없다. 선양에 거주하는 미국 교민의 보호가 불가능하다.” 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미국에 보낼 문건이 있으면 내게 보내라. 군관회의 비준을 거쳐 신화사(新華社)가 발송해 주면 된다.” 워드도 지지 않았다. “무전시설은 미국 정부 재산이다. 군관회에 보관시키려면 국무부의 비준을 거쳐야 한다.” 논쟁이 길어지자 우가 자리를 뜨며 한마디 했다. “정 못하겠으면 우리가 사람을 파견하겠다.” 영사관으로 돌아온 워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만 했다. 불필요한 일인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선양 점령 6일 후 군사관제위원회는 시장 활성화를 위해 서점부터 문을 열었다. 국민당 선전부 직할이었던 서점을 동북서점으로 탈바꿈시켰다. [사진 김명호]

선양 점령 6일 후 군사관제위원회는 시장 활성화를 위해 서점부터 문을 열었다. 국민당 선전부 직할이었던 서점을 동북서점으로 탈바꿈시켰다. [사진 김명호]

같은 날 밤, 시바이풔(西柏坡)의 중공 중앙지휘부,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를 통해 선양군관회가 보낸 전문을 본 마오쩌둥은 혀를 찼다. “외교에 경험이 없다 보니 소란만 떨었다. 우슈촨에겐 좋은 경험이다. 앞으로 미국과 맞서야 할 일이 많다. 합리와 억지를 적절히 혼용할 줄 아는 인재가 필요하다. 우슈촨을 염두에 둬라.” 마오의 사람 보는 눈은 일품이었다. 2년 후 6·25전쟁이 발발하고 미 7함대가 대만해협을 봉쇄하자 신중국은 우를 UN에 특파대사로 파견했다. 판문점 정전회담을 막후에서 지휘한 리커농(李克農·이극농)의 건강이 엉망일 때 대안으로 내세운 사람이 우였다. 우는 4인방 재판에도 재판관으로 참여했다.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에게 불평을 늘어놨다. “레닌의 명언처럼, 모든 일은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지금 선양은 해방구다. 국민당 통치 지역이 아니다. 국민당이 미국에게 준 권리나 권한은 우리와 상관이 없다.” 저우는 마오의 의견대로 선양에 보낼 답전을 작성했다. 자정 무렵 초고를 본 마오는 몇 자 손을 봤다. 앞머리에 마오(毛), 류(劉), 주(朱), 런(任), 네 자를 쓰고 毛에 동그라미를 둘렀다. 류샤오치(劉少奇·유소기), 주더(朱德·주덕), 런비스(任弼時·임필시) 등의 의견을 구한다는 의미였다. 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 “미 영사관은 무전기를 보관하겠다는 우리의 요구를 거절했다. 미국은 양손잡이다. 우리를 영사관으로 몰고, 우리가 강제로 영사관에 진입해 미국 정부의 재산을 탈취해야 직성이 풀린다. 우리의 대책은 주동적이라야 한다. 해방구 정부는 미국 정부와 외교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 미국영사관이 누리는 모든 권리는 국민당 정부에게 얻은 것이다.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 우리 인민정부에게 선양에 주재하는 영사관원들은 외국 교민이다. 보호 대상이지 외교업무를 주고받을 이유가 없다. 외국 교민은 군관회가 선포한 법령을 준수해야 한다. 군관회는 인신(人身)과 실내를 수색할 권한이 있다. 자유행동을 금지하고 강제로 출국시킬 권한도 있다. 무전시설을 압류해서 잘 보관해라. 쌍방이 정식 외교관계를 맺고 전 영사관 관원들이 돌아오면 돌려줘야 한다.”

군관회는 미 영사관 봉쇄, 직원 연금

19일 밤, 군관회 주임 천윈(陳雲·진운)이 회의를 소집했다. “내일 오후 1시 시원하게 대변(大糞)볼 준비해라.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저항이 있을지 모른다. 대항은 금물이다. 때리면 맞아라. 미 영사관 무전시설과 발전기를 몰수해 봉인한 후 쌍방의 서명을 잊지 마라. 모욕적 행위를 엄금한다. 쓸데없는 대화 나누지 말고 다른 물건에 손대지 마라. 무기 휴대를 불허한다.” 중앙이 지시한 후속 사항도 설명했다. “주석의 명령이다. 영사관을 봉쇄하고 관원들은 분산시켜 연금에 처한다. 훗날을 생각해 여지를 둬라. 감금이라는 용어는 입에 올리지 마라. 식음료는 충분히 제공한다. 영사관에 근무하는 외국 교민이나 중국인의 출입은 모른 체해라. 가족 왕래와 전화도 허용한다. 서신은 우리가 대신 전달한다. 몰수가 끝나면 전원을 절단해라.”

저우언라이가 군관회 간부들에게 마오쩌둥의 구상을 전문으로 보냈다. “미국은 장제스와 국민당을 지지한 지 오래다. 중공은 미국을 적으로 대한 적이 없다. 국민당 지지를 철회하고 승인해주길 바랄 뿐이다.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추방할 이유는 없다. 제 발로 나가야 제 발로 돌아온다. 동북은 소련, 외몽골, 북조선과 인접한 특별한 지역이다. 중공 중앙은 소련의 안전과 이익도 고려해야 한다.”

소련과 이란에 20여 년간 근무했던 워드는 황당했다. 연금기간 별꼴을 많이 겪었다. 평소 순종만 하던 중국인 직원들이 밀린 월급 달라고 불만을 표출했다. 여직원 한 명이 워드에게 대들었다. 참다못한 워드가 주먹을 휘두르자 여직원이 계단으로 굴러 떨어졌다. 동북 전역이 들고 일어나자 마오쩌둥이 워드의 체포를 지시했다. 워드와 영사관원들이 공안에게 끌려나올 때 1000여 명이 몰려와 “미 제국주의 타도”를 외쳤다. 재판에 회부된 워드는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추방됐다.

신중국 선포 2개월 후인 1949년 12월 11일, 무장한 공안의 감시 받으며 영사관 관원들과 함께 남행열차에 오른 워드는 웃음을 잃었다. 중공은 워드 일행을 태운 미국 수송선이 영해를 빠져 나가기까지 오성홍기를 게양하라고 요구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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