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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름 잊고 운명에 맞서노라’…나치 침략 고통 달래준 와인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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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6호 24면

와글와글 

마룬5의 노래 ‘선데이 모닝’을 듣고 외출할 때만 해도 흥겨웠던 일요일 분위기는 지하철 계단에서 스마트폰을 떨어뜨리면서 엉망진창으로 변해 버렸다. 액정이 망가지고 휴대전화도 작동이 안 되니 약속 장소가 어디인지, 만나기로 한 사람에게 전화조차 할 수 없었다. 서둘러 귀가해 후속 조치를 취했지만 우울한 마음은 가시지 않아 영화 ‘글루미 선데이’를 다시 보았다. 아름다운 도시 부다페스트를 배경으로 만든 이 영화는 독일과 헝가리 합작품으로 2000년에 개봉됐다.

헝가리 사람, 나치·소련군 핍박 받아

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한 장면. [중앙포토]

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한 장면. [중앙포토]

고혹적인 분위기의 여인 일로나(에리카 마로잔)를 두고 레스토랑의 유대인 주인 자보와 피아니스트 안드라스의 아슬아슬한 삼각관계와 피아노 음악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다뉴브강의 서편에 있는 부더(Buda)와 동편의 페슈트(Pest), 양 지구를 연결하는 세체니 다리를 비추는 이 영화는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의 조화라는 면에서 호평이 많았다.

그런데 내가 다시 본 ‘글루미 선데이’에서는 먹고 마시는 장면과 와인이 자주 눈에 뜨인다. 레스토랑 주인 자보가 질투와 분노로 레스토랑 지하 와인 저장고에서 생테밀리옹 지방의 그랑크뤼급 고급 와인 ‘샤토 뒤 파라디스’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장면이나 중요한 순간에 등장하는 ‘멈’(MUMM) 같은 샴페인이 단적인 예이다. “구하기 힘든 포도주, 군델 레스토랑에서도 못 구한 것을 가져왔다.” 군델(Gundel)이란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유명한 고급 식당을 말하며 영화의 대부분은 세트에서 촬영되었지만 실내 콘셉트는 이 식당에서 빌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니크 바르코프가 쓴 소설 『글루미 선데이』의 표지.

니크 바르코프가 쓴 소설 『글루미 선데이』의 표지.

원작은 어떻게 그려져 있을까? ‘글루미 선데이’의 원작자는 니크 바르코프. 독일 시사주간지 ‘슈테른’의 뉴욕, 런던, 도쿄 특파원을 역임한 언론인 출신으로 원제목은 『슬픈 일요일에 관한 노래』(Lied vom traurigen Sonntag)였다. 어릴 때부터 ‘글루미 선데이’의 매력적인 선율에 매료된 작가는 부다페스트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했던 자보(Szabó·헝가리 발음으로는 ‘서보’)라는 유대인을 소재로 전후 나치 처리 문제를 1988년에 소설로 발표해 화제를 모았다. ‘글루미 선데이’는 피아니스트 셰레시 레죄가 1933년에 발표한 곡으로 한때 자살을 충동하는 곡이라는 오해로 금지되기도 했지만 빌리 홀리데이 등 유명 가수들이 리메이크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이 영화에서는 버뮤다 출신의 여성가수 헤더 노바가 바이올린과 전자기타로 편곡해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소설과 영화는 주제와 줄거리, 이야기 방식에서 크게 차이가 났다. 영화에서는 한 여인과 두 남자의 삼각관계가 구심점이지만 소설에서는 그런 설정은 전혀 없고 나치의 헝가리 침공과 유대인 학살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 통계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2차대전 당시 헝가리에는 15만~ 20만 명의 유대인이 살았다. 진지한 소설이기는 하지만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철학도 종종 등장한다.

“자보는 일생 유대교를 순순히 믿은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개혁파 유대인도 아니었다. (중략) 자보가 인생에서 원했던 것은 안락하게 꾸민 테이블에 좋은 음식을 내놓아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북극에 사는 에스키모, 도나우강 유역에 사는 지주, 나이지리아의 흑인, 누구든 행복해하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와인은 역사 뛰어넘는 보편적 언어

그러하기에 그의 메뉴판에는 유대교 율법에 저촉되는 돼지고기로 만든 슈니첼도 있었다. 헝가리를 대표하는 걸쭉한 쇠고기 스튜인 굴라쉬에 대한 언급이 빠질 리 없다. “굴라쉬는 변호사 세켈리가 너무나 좋아해서 유명해졌어. 그런데도 세켈리의 이름을 따지 않고 세게드 굴라쉬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지. 세게드라는 도시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말이야.”

굴라쉬는 ‘구야시(gulyas) 레베시(Leves)’의 준말이다. ‘구야’는 목동을 의미하며, 목동들이 요리하고 남은 것을 끓여 먹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굴라쉬가 나오면 토카이 와인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다.

“미국인 여행객들은 군델에 오면 무조건 집시 음악을 들으려 한다. (중략) 손님들은 와인을 담은 오크통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와인의 산지에 대해서도 상관하지 않는다. 심지어 토카이 와인의 종류도 따지지 않는다.”

부다페스트에 많은 집시와 관광객들의 깊이 없는 태도를 빗댄 것이다. 특히 미국 필라델피아와 클리브랜드에서 온 관광객이 많은 것은 그곳에 헝가리 출신 이민자가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토카이는 헝가리 동북쪽에 위치한 지방과 그곳에서 만드는 유서 깊은 귀부 와인을 뜻한다. 아름다운 특유의 황금빛 때문에 ‘황금의 액체’(Liquid Gold)라 불린다. 디저트용 와인으로 유명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에서 스위트 와인만 생산되는 것은 아니어서 이곳 사람들은 디저트 와인을 ‘토카이 아수’(Tokaji Aszu)라 부른다. 이 소설에는 헝가리 시인 페퇴피 샨도르의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borozó)이라는 시가 실려있다. 우리처럼 헝가리도 성이 앞에 오고 이름이 뒤에 따라오니까 성은 페퇴피, 19세기에 유명한 시인이라고 한다. 그중 한 줄을 읽어본다.

‘시름을 잊게 하는 와인 옆에서/운명이여, 내 너의 힘에 맞서노라.’

코스모폴리탄이라는 말로 요약하기에 부다페스트는 너무도 복잡한 역사를 갖고 있다. 헝가리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머저르’(magyar)라 부르며 동쪽의 유목적 문화와 섞이고 오스만제국과 빈의 합스부르크제국의 영토이기도 하였으며 나치와 소련군의 침략도 받았다. 음식과 음악, 와인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보편적 언어다. 그런 때문일까? 주인공 자보는 술에 취해 라틴어 속담을 말한다. “in vino veritas(와인 속에 진실이 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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