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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다구요? 요즘 핫한 브로드웨이판 마당극이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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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6호 18면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뮤지컬 ‘하데스 타운’의 두 배우 박강현·강홍석

10년지기인 강홍석(오른쪽)과 박강현이 연기를 함께 하는 건 처음이다. 정준희 기자

10년지기인 강홍석(오른쪽)과 박강현이 연기를 함께 하는 건 처음이다. 정준희 기자

올해 뮤지컬계 최고 기대작 ‘하데스 타운’이 개막했다.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를 재해석해 2019년 토니어워즈 작품상과 연출상 등 총 8개 부문을 휩쓴 브로드웨이 최신작인데, 한국이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라이선스를 땄다. 팬데믹으로 셧다운됐다가 18개월 만에 문을 연 본고장에서도 가장 핫한 무대를 우리가 동시에 즐기게 된 셈이다.

작사·작곡·극작에 싱어송라이터 아나이스 미첼, 연출에 상반기 최고 화제작이었던 ‘그레이트 코멧’의 레이첼 차브킨 등 여성 창작진이 돋보이는데, 한국판은 초호화 캐스팅도 화제다. 원톱 주인공이 아니라 하데스, 헤르메스, 페르세포네 등 여러 신들이 저마다 존재감을 과시하는 만큼, EXO 시우민에서 ‘레미제라블’ 김우형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주연급 배우들을 대거 투입해 무려 6개월 간의 대장정에 돌입했다. 대체 어떤 무대길래 이렇게 판을 벌인 걸까.

사실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음유시인 오르페우스가 독사에 물려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지옥까지 가서 찾아내지만, ‘돌아보지 말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결국 영영 이별하게 되는 비극이다. ‘하데스 타운’은 이 가장 오래된 신화의 배경을 자본주의 굴레에 갇힌 지옥으로 옮겨, 지금 생생히 살아있는 무대로 만들었다. 신화 속 신들의 전령 대신 해설자 역할이 된 헤르메스 역의 강홍석(35), 음유시인 대신 재즈바 웨이터로 변신한 오르페우스 역 박강현(31)은 “열 번 봐도 안 질릴 새로운 무대”라고 자신했다.

“처음엔 일반적인 작품과 너무 달라서 이게 뭐지 싶었어요. 화려한 무대와 의상 같은 건 전혀 없고 그냥 심플한데, 가슴을 뛰게 하죠. 뭔가 굉장히 똑똑한 연출이 새로운 장을 개척한 느낌이에요”(강)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게 진짜 신선했어요. 나름 사회적인 문제를 많이 가져왔는데 그것만으로도 재미있고, 한마디로 트렌디한 거죠.”(박)

브로드웨이 최신 화제작인 만큼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오리지널 창작진의 선택을 받은 두 사람이지만, 적응 과정은 험난했다. 연기를 하다 중요한 순간에 노래가 나오는 일반적인 뮤지컬 문법과 달리, 러닝타임 내내 음악이 끊임없이 흐르면서 노래와 연기가 하나되는 독특한 스타일이라서다.

혼을 담는 소울, 우리 소리와 비슷

           뮤지컬 ‘하데스 타운’은 LG아트센터에서 내년 2월까지 공연된다. [사진 에스앤코]

뮤지컬 ‘하데스 타운’은 LG아트센터에서 내년 2월까지 공연된다. [사진 에스앤코]

“주변에서 다들 저와 찰떡이겠다고 했고 저도 그럴 줄 알았는데, 막상 너무 힘들었어요. 웬만한 넘버는 두 세번 연습하면 입에 다 붙는데 이건 2주를 해도 안 붙더군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듯 보여도 정확한 박자와 마디 안에서 리듬을 타면서 대사를 쳐야 되거든요. 혼자서 정말정말 많이 연습했습니다. 근데 오래 걸린 이유가 있더군요. 작곡가가 작품을 7, 8년 간 썼다고 해요. 그래서 이런 훌륭한 음악이 완성됐나 봐요. 부르긴 어렵지만.(웃음)”(강)

박강현이 맡은 오르페우스도 고음의 연속인데다 처음 잡아보는 기타까지 치면서 노래해야 하는 ‘극악의 난이도’다. “가성이 잘 되는 편이라 저도 처음엔 ‘내꺼다’ 싶었어요. 근데 2주가 지났는데 음악이 머리에 남는 게 없는 거에요. ‘아’ ‘네’ 같은 대사의 모든 음절에 음이 정해져 있으니까요. 결국 무조건 외우는 게 답이더군요.”(박)

재즈바에서 밴드와 배우가 어우러지며 관객에게 말을 거는 서사극 형식이 그간 익숙했던 뮤지컬의 정서와 많이 다르다 싶은데, 강홍석의 해석에 무릎을 쳤다. “꼭 미국식 마당극 같다”는 것이다. “어릴 때 판소리, 마당극 공부를 했는데, 헤르메스가 마당극 시작할 때 꽹과리 치면서 소개하고 추임새도 넣는 역할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미국의 소울과 우리 판소리가 잘 통하거든요. 리듬과 바이브레이션은 달라도 혼을 담아 노래하는 본질은 비슷한데, 그래서 이 작품도 1960년대 모타운 음악 같은 재즈로 푼 것 같아요.”(강)

적응은 힘들었지만, 작품 특유의 소울이 몸에 붙은 지금은 판소리 득음의 경지에 비유할 만큼 수월해졌다. 6개월 대장정이 두렵지 않은 이유다. “소울 음악을 워낙 좋아하거든요. 레이 찰스, 스티비 원더 음악을 어려서부터 끼고 살았고, 10대 땐 나스, 투팍 같은 힙합에, 지금은 브루노 마스에 빠져 있죠. 이 분들 흉내 내며 음악을 시작해서 그런지 관객분들도 너무 편안하게 봐주시고, 저도 지치지 않을 것 같아요.”(강) “저는 하도 고음을 내다보니 이제 목소리가 계속 뜬 상태가 되서 저음이 안나요.(웃음) 그래도 다른 공연보다 한 시간 이상 먼저 가서 목을 풀어야 안심이 되죠. 6개월이나 올인하는 건 처음인데, 잘 헤쳐나가야죠.”(박)

‘돌아보지 말라’는 신화의 뼈대는 그대로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는 게 좋다’는 고전적인 교훈보다 ‘어차피 돌아보게 돼 있다’는 21세기적 해석이라 울림이 세다. “중요한 순간에 사람들은 의심을 하잖아요. 의심이 들더라도 묵묵히 가보면 어떨까 싶어요. 대학 연기과 동기가 30명이었는데, 그중 전공 살린 건 한두 명이거든요. 도중에 스스로에 대한 의심 때문에 불안해져서 다른 길을 택하는 동기들 보며 어차피 한번 인생인데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어떨까 싶었는데, 이번에 그런 게 많이 스쳐지나가더군요.”(박) “마지막에 ‘그럼에도 우린 부르리라, 중요한 것은 결말을 알면서도 다시 노래를 시작하는 것. 이번엔 다를지도 모른다고 믿으면서’라는 제 대사가 있어요. 어차피 의심하게 돼있지만, 그래도 한번 더 리프레쉬하고 직진하자, 그런 얘기 아닐까요. 무명시절 오디션을 보면 음악감독들이 저더러 ‘빠다’라면서, 그렇게 부르면 안된다고 했었죠. 저도 의심이 들었어요. 내가 틀린건가? 근데 그때 클래식 안 배우길 잘한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니까요. 술 한잔에 떨치고 내 길을 갔죠. ‘방귀대장 뿡뿡이’ 조명 팔로우를 오래 해야 했지만(웃음), 감사하게 제게 맞는 옷도 생기더군요. 그때 의심 때문에 클래식을 배웠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겠죠.”(강)

가슴 때리는 전율, 공연장에서만 가능

오르페우스가 초목과 짐승까지 감동시켰다는 전설의 뮤지션인 만큼, 음악의 힘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데스 타운’에서 착취당하던 노동자들도 그의 노래에 비로소 허리를 편다. “일상에 지쳐 있다가 제 노래에 힘을 얻었다는 댓글을 보면서 늘 음악의 힘에 대해 생각해요. 슬플 때 슬픈 노래 들으면 더 슬퍼지는 게 아니라 위로를 받잖아요. 바다로 여행 가면서 여름 노래 틀면 행복이 배 이상 올라가죠. 음악이란 건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멋진 힘을 가진 것 같아요.”(박) “늘 그 힘을 느낄 수 있으니 우린 행복한 직업인 거죠.”(강)

두 사람은 10년지기다. 강홍석의 친구가 만든 작품으로 박강현이 데뷔한 인연으로, 대학로에서 뒷풀이하며 친분을 쌓았다. 연기를 같이 하는 건 처음인데, 2018년 ‘엘리자벳’의 루키니 역에 더블캐스팅된 적은 있다. 하얀 도화지처럼 모든 배역을 빨아들이는 박강현과 완성된 조각품에 매번 다른 옷을 걸치는 느낌의 강홍석. 극과 극 이미지의 두 사람이 같은 역을 나눴다니 흥미롭다.

“루키니는 대학시절부터 꿈꾸던 역할이었어요.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유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콰지모도처럼 쟁쟁한 선배들이 멋진 연기를 보여줬던 역할을 동경했던 건데, 요즘은 좀 달라졌죠. ‘하데스 타운’을 하며 남들이 안 가본 길에 매력을 느끼게 됐거든요. 뮤지컬 인생에 터닝포인트랄까. 앞으로 작품 선택할 때 생각의 폭이 좀 넓어질 것 같아요. 이번에 공연 잘 마치면 오히려 많은 후배들이 저희를 따라 부를 수도 있겠죠.”(강) “저도 ‘하데스 타운’이 매일 기다려지는 작품이 됐어요. 오르페우스도 세 명이 하고 있지만 각자 느낌이 다른데, 형이 저더러 너무 잘 어울린다고, 한 다섯 시즌 책임져야겠다고 해서 그럴까 해요.(웃음)”(박)

중앙SUNDAY 유튜브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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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무대에 올인할 형편들은 아니다. 강홍석은 드라마와 영화의 신스틸러로, 박강현은 크로스오버그룹 ‘미라클라스’ 멤버로 활약 중이기 때문이다. ‘본캐가 어느 쪽이냐’는 질문을 던져 봤다. “저는 어딜 가나 ‘뮤지컬 배우 강홍석’이라고 소개합니다. 저를 알린 곳이고, 뮤지컬이 없었다면 행복하게 살 수 없었을 거예요. 연극영화과를 나왔으니 어디서든 연기를 했겠지만, 뮤지컬이 주는 ‘심장어택’은 다른 데선 느낄 수 없거든요. 퉁퉁퉁, 가슴을 때리는 전율은 관객도 배우도 공연장에서만 느낄 수 있을 거예요.”(강) “저도 공연장에서 가장 행복해요. 음악이 있는 곳에 모이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시간을 공유하는 셈이죠. 핸드폰 때문에 생긴 거북목도 공연장에서 펼 수 있으니, 건강까지 챙길 수 있습니다.(웃음)”(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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