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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은화의 생활건축

서촌의 재개발 플래카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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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한은화 기자 중앙일보 기자
한은화 건설부동산팀 기자

한은화 건설부동산팀 기자

서울 경복궁 서측, 이른바 ‘서촌’이라 불리는 동네에 최근 플래카드가 일제히 걸렸다. 주요 길목마다 붙여졌다가 종로구청이 서둘러 수거해 간 플래카드의 내용은 이렇다. ‘한옥 보전지구 해제, 경복궁 역세권 개발 적극 추진’.

주민들의 단순 시위가 아니었다. 일부 주민은 한옥 보전지구 해제를 위한 동의서를 걷고 있다. 재개발 찬성 동의서도 곁들여서다. 이를 추진하고 있는 한 주민은 “체부동의 경우 찬성 동의서를 30%가량 걷은 상태”라고 말했다. 최근 오세훈 서울시장이 추진하고 있는 민간 재개발 구역의 공모 요건이 주민 동의 30%다.

최근 서촌 곳곳에 붙여진 재개발 플래카드. [사진 독자]

최근 서촌 곳곳에 붙여진 재개발 플래카드. [사진 독자]

서촌은 17년 전으로 돌아간 듯하다. 2004년 서촌 일대에는 재개발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필운1·체부1·누하1 등 서울시가 지정한 재개발 정비예정구역만 세 곳에 달했다. 일찌감치 한옥보존 및 동네 정비에 나섰던 북촌과 달리 서촌은 난개발로 몸살을 앓았다. 한옥이 헐린 자리에 빌라가 우후죽순 들어섰고, 살아남은 한옥도 낡고 불편한 옛집에 불과했다. 소방차가 들어오지 못하는 좁은 골목길, 악취 나는 하수관, 위험하게 늘어진 전선, 부족한 주차장·놀이터 등 오랫동안 방치한 옛 동네의 문제는 개인이 풀 수 없었다. ‘모두 밀고 새로 짓자’ 식의 재개발이 추진된 배경이다.

재개발에 첫 제동이 걸린 것은 2008년, 오세훈 시장이 한옥 선언을 하면서다. 부숴야 할 한옥은 삽시간에 보존해야 할 역사문화 유산이 됐다. 서울시는 서촌 재개발 정비예정구역을 모두 해제한 뒤 한옥보존구역으로 지정했다. 한옥을 보존하도록 규제하는 대신 한옥을 고치거나 수리할 때 저리 융자를 포함한 보조금을 지원하는 정책을 만들었다. 서울에서 한옥 신축 공사비는 3.3㎡당 1500만원이 넘는다. 수선비도 만만치 않다. 수리를 포기하는 집주인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원정책에도 억대 공사비를 감당하지 못해 한옥 수리를 포기한 집주인은 여전히 많다.

그리고 동네는 바뀐 게 없다. 재개발 추진의 가장 큰 이유였던 낡고 부족한 기반 시설이 더 낡고 더 부족해졌을 뿐이다. 재생사업이 추진되고 있지만, 주민들은 “재생에 실패한 창신동 사례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활동가들이 앞서서 공동체 활성화만 강조하는 탓이다. 결국 골목길 가꾸기, 이웃 알아가기 수준의 재생사업만 진행된다. 주민들이 원하는 소방도로나 주차장 같은 기반시설을 확충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드는 탓에 이와 관련한 주민 의견은 받더라도, 슬그머니 사업 계획에서 빠지고 만다.

창신동의 경우 노후 하수도관 교체에만 1000억원이 넘게 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의 재생 방식으로는 오래된 마을을 되살릴 수 없다. 서촌에 재개발 플래카드가 다시 붙여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