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한끼

수다 즐긴 판화가 오윤, 단골집 빌려 3박4일 술자리도

중앙선데이

입력 2021.10.02 00:02

업데이트 2021.10.02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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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6호 26면

예술가의 한끼

김지하의 시집 『황토』,『오적』등을 비롯한 많은 책에 표지화나 삽화 판화로 동참한 화가 오윤. [사진 가나아트]

김지하의 시집 『황토』,『오적』등을 비롯한 많은 책에 표지화나 삽화 판화로 동참한 화가 오윤. [사진 가나아트]

생애 첫 전시를 열자마자 곧 삶을 마친 작가 오윤(1946~86)은 부산 출생이다.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수정동 언덕에서 자랐다. 그의 부친은 경남 언양 출신의 소설가 오영수(1909~79)다. 도쿄에서 미술학교를 다녔던 오영수는 해방이 되자 경남여고의 미술교사가 됐다. 나중에는 미술과 국어를 함께 가르쳤다.

새로 창간된 월간지 ‘현대문학’의 편집장을 오영수가 맡게 되면서 가족이 서울로 이사 왔다. 오윤이 부산 수성초등학교 4학년이던 1954년의 일이다. 돈암동을 거쳐 우이동에 정착했다. 우이동 집은 대지가 150평 정도로 넓었다. 마당에는 텃밭이 있었는데 난초와 토마토 등을 키웠다.

1965년에 서울대 미술대학에 입학한 오윤은 동기생 오수환(1946~)과 가까워졌다. 오윤은 조소과, 오수환은 회화과였다. 오수환은 우이동 골짜기 오윤의 집을 자주 찾았다. 오영수는 오수환을 친아들처럼 아꼈다. 오윤과 아들 친구 오수환에게 매번 건네는 부탁이 ‘장인이 되게’였다. 겉멋을 부리지 말고 예술에 제대로 정진하라는 뜻이었다.

천상병 시인, 부친 집에서 기식하기도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서예가 오재봉(1908~91)의 아들 오수환은 부전자전으로 붓글씨에 능했다. 오영수는 오수환에게 글씨를 청했다. 오수환이 쓴 ‘정란이국’(庭蘭籬菊, 뜰의 난초와 울타리의 국화)은 현판으로 새겨져 오영수의 집필실에 문학진의 그림과 함께 나란히 걸렸다. 부산 시절부터 이준, 우신출 등 여러 화가와 교분이 있었던 오영수는 월간잡지 ‘현대문학’에 들어갈 표지화와 삽화 일로 친해진 서울의 화가들이 많았다.

오영수의 집에는 문인들이 자주 찾아왔다. 그 집에서 아예 기식하는 이도 있었다. 오영수는 그를 경상도식으로 “상빙아”라고 불렀다. ‘상빙이’는 오영수로부터 매일 버스비와 막걸리값으로 80원을 타서는 서울 시내를 오갔다. 어느 날 80원 주는 걸 잊고 출근해 버린 오영수에게 삐친 상빙이는 오영수의 애장품인 펠리칸 만년필을 숨기곤 돌려주지 않고 애를 먹였다. 오영수는 거금 500원의 배상금을 물고 상빙이를 달래어 만년필을 되돌려 받을 수가 있었다. 상빙이는 시인 천상병이다. 오윤에게는 늘 문학과 문인들이 가까이 있었다. 오윤의 작품에서 서사의 힘과 서정의 따스함이 함께 느껴지는 건 이런 내력과 무연하지가 않다.

오윤이 다닌 조소과에는 판화수업이 없었다. 회화과의 오수환은 김정자 교수에게서 두 학기 동안 판화수업을 들었다. 오윤이 오수환에게 목판화의 기본기에 대해 가르침을 요청했다. 다치지 않게 왼손을 열어 주고 칼의 각도를 낮추기 위해 오른손 손날을 바닥에 붙이는 요령, 나무결을 따라 선을 파내는 원칙 등 목판화의 기본이 오윤에게 전수됐다.

오윤, ‘칼노래’, 1985, 목판, 채색, 32.2x25.5㎝. [사진 가나아트]

오윤, ‘칼노래’, 1985, 목판, 채색, 32.2x25.5㎝. [사진 가나아트]

비슷한 시기에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오윤과 오수환은 혜화동로터리에서 가까운 동성중학교와 보성고등학교에 직장을 잡았다. 자주 만나서 가는 술집은 혜화동로터리의 상업은행 뒤편에 있던 공주집이었다. 위장이 좋지 않아 안주를 많이 먹질 못했다. 근처에 사는 장욱진 또한 공주집의 단골이었다.

대학 동기인 오윤, 오수환, 임세택, 오경환과 홍익대 출신으로 향토사학자 윤경렬(1916~99)의 아들인 윤광주 등이 의기투합하여 벽화제작을 위한 회사를 만들었다. 임세택은 상업은행장인 부친을 설득했다. 구의동, 삼각지 등 은행지점들의 외벽을 장식하는 환경조형물이 이들에게 맡겨졌다. 광장시장의 서쪽 끝 종로4가 네거리 우리은행(옛 상업은행) 전면 외벽에는 이들이 제작한 황토색의 테라코타 벽화가 지금까지 잘 보존돼 있다. 경주 윤경렬의 고청공방에서 1000개 이상의 테라코타를 굽고 이를 서울로 공수한 후 연결하여 만든 대형 부조벽화다.

윤경렬(가운데), 최민(왼쪽)과 함께한 오윤(오른쪽). [사진 가나아트]

윤경렬(가운데), 최민(왼쪽)과 함께한 오윤(오른쪽). [사진 가나아트]

오윤의 가족 구성원들은 끈끈한 데가 있었다. 오영수, 오윤, 오윤의 누나 오숙희(1939~) 등 가족이자 동료 예술인이기도 한 이들의 DNA가 서로 끌어당기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했다. 오윤은 시인 김지하 등 오숙희의 서울대 미대 친구들과도 친했다. 오숙희는 사석에서 오영수의 애창곡 ‘북국 오천키로’를 즐겨 불렀다. 모스도와야, 키타이스카야 등 국제도시 하얼빈의 러시아어 거리 이름이 가사에 등장하는 이국정서의 옛날 대중가요였다. 오영수는 젊은 날 1년간 만주에서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 시절의 그리움을 노래로 달랬다. 오숙희도 오윤도 대중가요를 좋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80년대 초 오윤은 선화예고에 강사로 나갔다. 1시간의 강의료가 만원이었다. 하루 4시간 1주일에 3일을 강의하니 한 달이면 48만원이 됐다. 당시 대기업 신입사원의 월급이 30만원쯤 할 때니 48만원은 꽤 큰돈이었다. 한번은 월급날 오윤이 김호득(1950~) 등 동료들을 선동했다. 현금이 든 월급봉투를 집에다 갖다주지 말고 다 모아 오늘 하루 호기롭게 다 써 버리자는 것이었다. 인생에 한 번쯤은 그런 일탈도 있어야 한다고 그럴 듯하게 설파했다.

오윤의 말투는 조곤조곤하다. 목소리와 화법에 사람을 끄는 설득력과 마력이 있었다. 마침 부슬부슬 비마저 내려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다들 홀린 듯 봉투를 내놓았다. 다섯 개의 현금봉투를 챙긴 선동가 오윤이 앞장섰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약했다. 택시 두 대에 분승하여 서울 근교로 나갔으나 그 돈을 다 쓸 만한 고급술집을 끝내 발견할 수가 없었다. 맥주 몇 잔 마시는 거로 싱겁게 끝내고 남은 돈은 다 돌려주었다. 검박한 생활의 실천가 오윤에게 그런 호기는 역시 무리였다.

오윤에게 만만한 단골집은 부천쯤에 있었다. 오윤, 김호득 등 4명이 찾아가서 술집 여주인더러 아예 가게를 비우고 3박 4일 집에 다녀오라 했다. 자기 집인 양 가게를 차지하고선 불철주야 마셔 댔다. 술집에 있는 술과 안주를 다 비웠다. 오윤은 얘기하는 걸 좋아했다. 음주량은 많지 않으나 홀짝거리며 끊임없이 마셔 대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황석영, 김지하 그리고 자신의 부친인 오영수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

오윤의 작업실은 덕성여대 근처 가오리의 시장 안쪽에 있었다. 대문을 열면 마당 건너 본채가 있고 대문 왼쪽 5평 남짓한 별채가 창고 겸 작업실이었다. 장독과 화구가 뒤섞인 공간이었다. 벽에는 걸개그림이 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 서대문미술학원 강사 시절, 다른 강사들이 잡담으로 시간을 보낼 때에도 오윤은 무리에서 벗어나 따로 드로잉이나 판화 밑그림 작업을 했다. 귀가하면 그 밑그림으로 본채 마루에서 거의 매일 오전 시간에 판각했다. 오윤은 무리하게 작업하는 법이 없었다. 소품의 판화제작이 체질에 맞았다.

3000원에 판 작품, 현재 수천만원 호가

그러다 김용태가 운영하던 인사동의 그림마당 민에서 열리기로 한 그의 개인전 준비를 위해 본격적으로 가오리의 창고 겸 작업실에서 목판화 작업을 했다. 조수 몇 사람이 필요했다. 정복수(1955~)는 김용태의 소개로 조수가 되어 가오리를 두 번 찾아가 오윤의 판화제작을 도왔다. 석판화와 동판화는 프레스기 등 복잡한 장비와 도구가 필수적이지만 목판화는 그럴 필요가 없다. 따로 공방이 없어도 제작이 가능하다. 오윤의 작업실에는 프레스기도 바렌도 없었다. 숟가락으로 일일이 종이를 문질러 판목의 이미지를 전사했다. 노동집약적인 작업이었다.

오윤은 목판화 작품이 가능한 많은 대중에게 감상되는 다다익선을 택했다. 그 방편이 판화가 책 표지화나 삽화용으로 다시 인쇄돼 널리 퍼지는 것이었다. 김지하의 시집 황토, 오적 등을 비롯하여 많은 책에 그의 판화가 동참했다. 그런 철학을 가진 그였기에 자신이 제작한 판화의 에디션 넘버링에는 무심했다. 대부분의 목판화가 제작 후 넘버링 없이 사인을 하고 도장을 찍는 것으로 끝냈다. 단색판 소품은 3000원에 팔았다. 지금은 어떤 건 장당 수천만원까지 나간다. 이 정도면 호기를 부릴 만도 한데 너무 늦게 찾아온 운은 무망이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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