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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키호택과 함께 걷는 산티아고길 80일] 공항에서 손가락으로 밥 먹는 황당한 아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색다른 여행기를 연재합니다.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당나귀와 걷는 이야기입니다. 글과 영상과 사진은 임택 여행가가 보냅니다. 임택씨는 폐차 직전의 종로 12번 마을버스 ‘은수’를 타고 세계일주를 했습니다. 2014년에 떠나 677일 만인 2016년 9월 27일 서울에 입성했습니다. 남미~중미~북미~유럽·아프리카~중앙아시아~시베리아~일본~부산~서울 여정입니다. 5개 대륙의 48개국 147개 도시를 지나며 모두 7만㎞를 달렸습니다. 21세기 한국판 돈키호테라 할만합니다. 이번 산티아고 길에는 당나귀 '동키호택'과 열아홉살 동훈이가 길동무입니다. 당나귀 이름은 돈키호테와 임택을 섞어 만들었습니다. 영어로 당나귀를 동키(donkey)라고 부르니 그럴듯합니다.

팬데믹으로 고단한 날들, 여행기가 조금이나마 위안이 됐으면 합니다. 여정은 현지 사정을 몰라 넉넉히 80일로 잡았습니다. 더 일찍 마칠 수도 있습니다.]

[동키호택과 걷는 산티아고길 80일]2화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 갔을까. 썰렁한 인천공항 출국장.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 갔을까. 썰렁한 인천공항 출국장.

세계적인 코로나의 영향을 가장 크게 느낄 수 있는 곳은 역시 공항이다. 인천공항에 있어야 할 당연한 풍경이 사라졌다. K항공의 승객들이 모두 들어간 후 텅 빈 공항을 보니 가슴이 찡하다. 갑자기 걱정이 밀려왔다. 이러다 정말 지구에 뭔 일이 터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훈아 정말 큰 일 나는 거 아냐? 이게 말이 되느냐고.”
동훈이의 대답은 쿨하다.
“이미 큰일 났는데요 뭘.”
어쩌면 나는 여행 내내 이 아이를 이기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장기 여행은 체력관리가 필수다. 잘 먹고 잘 자야 버틴다. 의자에서 쪽잠. 터미널이 한산하니 누리는 호사다.

장기 여행은 체력관리가 필수다. 잘 먹고 잘 자야 버틴다. 의자에서 쪽잠. 터미널이 한산하니 누리는 호사다.

평소 여행 고수는 짐을 작게 싼다며 동훈이에게 말했는데 얼씨구. 나는 대형 배낭 두 개 동훈이는 달랑 한 개다. ‘얘가 언제 고수가 됐지?’ 배낭 크기는 욕심의 크기라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결국 내 짐 하나가 동훈이 어깨로 이사를 갔다. 욕심을 나누니 몸도 가볍다. ‘동훈아 이런 게 여행이라야. 나눔의 정신’

동훈이 배낭 내용물. 알고보니 짐 싸는데 도사였다.

동훈이 배낭 내용물. 알고보니 짐 싸는데 도사였다.

최소한의 필수품만 넣어 하나로 만든 동훈이 가방. 타고난 여행가의 소질이 보인다.

최소한의 필수품만 넣어 하나로 만든 동훈이 가방. 타고난 여행가의 소질이 보인다.

 기내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빼곡하다. 비행기는 만석으로 보였다. 좌석이 좁아서 사람들이 겨울철 참새처럼 좌석에 박혀있다.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눈빛만 초롱초롱했다.
다른 사람들은 짐을 넣느라 까치발을 띠는 데 동훈이에게는 그냥 사물함 정도일 뿐이다. 모든 사람들이 동훈이 어깨 아래에서 움직인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동훈이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동훈아 너 천장에 손닿니?”
동훈이가 손을 들어 천장을 쓰다듬으며 씨익 웃는다. 순간 밀려오는 이 박탈감은 뭐지? 나도 지지 않으려고 천장을 향하여 팔딱 뛰어 보았다. 어림없다. 다시 팔짝 팔짝. 실패 또 실패. 사람들이 이상한 아저씨의 이상한 행동에 시선 집중. 어딜 가더라도 눈에 띈다니까.

 농구선수 덩치 못잖은 동훈이. 키가 194cm라 팔을 뻗으니 천장에 닿는다.

농구선수 덩치 못잖은 동훈이. 키가 194cm라 팔을 뻗으니 천장에 닿는다.

인천공항의 썰렁함을 뒤고 하고 10시간 만에 카타르 도하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분위기는 우리 공항과 딴 판이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코로나의 긴장감을 찾을 수 없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는 것을 빼면 공항이 비좁을 정도로 북적대는 것은 예전과 같았다.
“동훈아 우리 카타르의 문화를 느낄 만한 뭐가 없을까? 환승하려면 3시간이나 남았는데?”
“음식을 먹어보면 어떨까요 아부지. 중동음식.”
나름 좋은 생각이다. 무거운 짐이 있어 지나가는 공항 전동차를 세웠다.
“카타르의 멋진 문화를 체험하고자 전통 음식점을 찾는데요. 데려다주실 수 있을까요?”
아부성이 짙고 어려운 말이라 영어 따발총 동훈이에게 통역을 시켰다.
“Where is the food court?”
어 씨. 내가 할 걸. 여행은 이제 시작인데. 벌써 10대 빵으로 참패를 당하는 느낌이다.
구렛나루가 수북한 운전자가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셨다. 사실 이 전동차는 노약자나 임산부가 타는 거지만 우리처럼 어리벙벙한 여행자를 위해서도 서비스는 제공되는 것 같았다.
기분이 좋은 것도 진짜 30초. 차가 움직이는가 싶더니 내리란다. 아저씨는 손가락으로 식당 쪽을 가리키며 뭐라고 말했는데 못 알아들었다.
“저기가 푸드코트래요. 양고기가 맛있다네요.”
이제 동훈이는 내가 묻지 않아도 통역을 했다. 초고속으로 나의 밑천이 드러난 느낌은 뭐지?
“나도 알아들었어. 양고기”
동훈이가 또 씨익 웃는다. 이번엔 졌는지 이겼는지 잘 모르겠다. 유럽 여행이 처음이라는 동훈이를 위해 맛있는 것을 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카타르 음식점 앞에는 유독 사람이 적었다. 그 옆에 햄버거 가게는 긴 줄이 늘어져 있다. 이상하게도 미국을 싫어하는 중동사람들이 콜라·햄버거·치킨·피자 같은 미국산 음식을 좋아한다.

도하 공항 푸드 코트. 씩씩하게 시켜 먹었는데 계산서를 보고 으악~. 환율에 신경을 못 써 바가지 썼다.

도하 공항 푸드 코트. 씩씩하게 시켜 먹었는데 계산서를 보고 으악~. 환율에 신경을 못 써 바가지 썼다.

아저씨의 말대로 양고기 요리가 맛있게 보였다. 밥을 쪄서 향료와 비벼 놓았고 그 위에 큼지막한 양고기 다리가 올려 있었다. 동훈이는 양고기 대신 닭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택했다.
"동훈아 이슬람에서는 손으로 먹는다? 우리도 손으로 먹자."
"아부지나 드세요. 저는 숟갈로 먹을 거예요."
세대 차이가 삐끗하고 내비쳤지만 대수롭지는 않다. 나는 손으로 양고기를 뜯은 다음 밥에 섞어 손으로 먹기 시작했다. 이슬람식의 식사법이다.
"근데 아부지 손 닦았어요?"
"어? 아니?"
"아 더러워."
손을 닦으려했지만 이미 입속에서 다 닦여진 상태였다. 하지만 음식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정말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었으니까. 서로를 쳐다보며 만족감에 미소를 지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고, 이슬람 국가에서는 이슬람 식으로. 손으로 슥슥~.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고, 이슬람 국가에서는 이슬람 식으로. 손으로 슥슥~.

그 때 휴대폰으로 '빼꼭 빼꼭~'하는 소리와 함께 문자가 날아왔다.
'마스타카드 해외승인 직불출금 7만6413원'
눈을 의심할 식사 가격. 체할 뻔 했지만 내색을 하지 않았다. 가격표가 카타르 돈으로 표시되어 있어서 사전에 알지 못한 일이었다.
동훈이가 식당을 나오며 직원에게 물었다.
"우리가 먹은 거 밖에서는 얼마 정도 해요?"
덥수룩한 수염이 멋스러운 직원이 웃으면 말했다.
"7달러 정도 해요."
카타를 도하공항에서의 문화 충격을 제대로 참교육 받았다. 뭐 이런 게 여행이지.
우리가 환승한 비행기는 6시간을 날아 파리의 햇살을 받으며 공항에 도착했다. 한 덩치 하는 동훈이가 좁은 자리에서 버티느라 많이 피곤해보였다.
“동훈아. 아부지가 비즈니스석 끊어줄 걸 그랬나봐.”
당연한 사탕발림.
“아니에요.”
비즈니스석의 정체를 모르는지 동훈이가 쿨하게 대답했다.
파리의 공항은 코로나를 비껴간 듯 엄청난 사람들로 붐볐다. 준법정신이 강한 공항이다 보니 모두 마스크를 착용했다. 한국에서 발급받은 영문 백신 증명서가 있으면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출국장 옆에 웬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이 사람들은 PCR 검사를 받기 위해 서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프랑스는 〈백신접종증명서〉가 없어도 입국이 가능하단다. 물론 격리기간도 없다.
이렇게 우리는 대한민국을 완전히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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