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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인사이드]치열했던 6·25전쟁 고지전, 멈출 기회도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휴전 직전에 있었던 폭찹힐 전투 당시 잠시 휴식 중인 유엔군. 휴전을 염두에 두고 벌어진 고지전은 전선의 변동이 심하지 않았으나 희생이 꽤 많았다. 사진 nationalvmm.org

휴전 직전에 있었던 폭찹힐 전투 당시 잠시 휴식 중인 유엔군. 휴전을 염두에 두고 벌어진 고지전은 전선의 변동이 심하지 않았으나 희생이 꽤 많았다. 사진 nationalvmm.org

지난해 10월 방탄소년단(BTS)은 한ㆍ미관계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밴 플리트상’을 수상한 후 “올해는 한국전쟁 70주년으로 우리는 양국(한미)이 함께 겪었던 고난의 역사와 많은 남성과 여성의 희생을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는 소감을 발표했다.

이에 중국에선 격앙된 반응이 나왔다. 항상 그랬듯이 중국 관영 매체가 ‘항미원조’ 운운하며 먼저 논란거리를 만들고 이에 중국 네티즌들이 합세했다.

1950년 시작된 전쟁에서 한·미 양국은 어떤 고난을 겪었던 것일까.

고지전에서 부상당한 동료 병사를 후송하는 미 2사단 병사들의 모습. [사진=www.bostonherald.com]

고지전에서 부상당한 동료 병사를 후송하는 미 2사단 병사들의 모습. [사진=www.bostonherald.com]

1951년 9월 5일, 마침내 미 2사단 9연대가 983고지를 재점령하면서 피의 능선 전투는 막을 내렸다.

20여 일간 벌어진 격전에서 국군 전사 및 실종자는 154명 부상은 816명이 나왔다. 미군은 전사 및 실종자 587명, 부상자 1216명으로 엄청난 손실을 당했다.

이때 포탄 41만 발을 소모했는데 이는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이 6ㆍ25 전쟁이 발발한 이래 가장 많은 포격이 이루어진 전투였다고 회고했을 만큼 엄청난 수량이었다.

이러한 숫자들은 고지전의 치열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지표지만 설령 승리했어도 결코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었다. 투입 대 효과를 무시하고 전쟁을 치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야전에서 작전을 논의 중인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왼쪽)와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6ㆍ25전쟁 후반기에 유엔군을 이끌었다. 사진 arsof-history.org

야전에서 작전을 논의 중인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왼쪽)와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6ㆍ25전쟁 후반기에 유엔군을 이끌었다. 사진 arsof-history.org

휴전회담이 시작된 이후부터 전쟁은 좁은 곳에서 더 많은 희생이 발생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그래서 언제 있을지 모를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하염없이 피해를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이 적과 아군 모두에게 심각한 고민이 됐다.

한반도의 지리적 여건을 고려한다면 고지전은 결코 피할 수 없기에 지금도 중요한 훈련 과정이다. 하지만 6ㆍ25 전쟁 후반기 고지전은 오로지 휴전을 했을 때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것이 목적이어서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휴전이 아니라 승리로 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공세를 실시했다면 그냥 지나칠 만한 의미 없는 수많은 고지를 놓고 싸움이 벌어졌다. 그래서 예상보다 희생이 컸다.

어떻게든 유리한 위치에 전선이 놓이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고지를 하나하나 점령하기는 무리였다. 지옥의 참호전으로 악명이 높았던 제1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보다도 상황이 더욱 나빴다.

유럽에서는 양측 세력이 워낙 팽팽하게 대립해 전선이 고착됐다. 그러나 1951년 가을 이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은 휴전을 가시화하고 제한적으로 격전을 벌이던 중이었기에 언제 상황이 돌변할지 알 수 없었다.

전쟁고아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대장. 예편 후에도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그를 기려 코리아 소사이어티 주관으로 한미관계의 우호 증진에 기여한 사람에게 1995년부터 ‘제임스 A. 밴 플리트 상’을 수여한다. 사진 koreasociety.org

전쟁고아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대장. 예편 후에도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그를 기려 코리아 소사이어티 주관으로 한미관계의 우호 증진에 기여한 사람에게 1995년부터 ‘제임스 A. 밴 플리트 상’을 수여한다. 사진 koreasociety.org

고심을 거듭한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이런 식으로 고지전을 계속할 수 없다고 결심했다. 휴전이라는 명제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작전을 펼치고는 있었지만, 결코 옳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는 북진과 같은 대규모 공세까지는 아니어도 휴전을 유도할 수 있는 대대적인 군사 행동을 구상했다. 이에 ‘맹조의 발톱’으로 명명한 작전 계획을 세워 리지웨이에게 건의했다.

개요는 원산 부근에 대규모 부대를 상륙 및 공수해 공산군 배후를 절단시킨 후, 전선을 김화-금강산-장전까지 밀어 올리는 것이다. 앞서 1950년 10월 감격스러웠던 북진 이후 처음으로 38선 이북 점령을 목표로 입안된 야심만만한 공세 계획이다.

6ㆍ25 전쟁 당시 고지전에서 수류탄을 던지고 있다. 국방부

6ㆍ25 전쟁 당시 고지전에서 수류탄을 던지고 있다. 국방부

밴 플리트는 제한적이지만 적에게 심각한 치명타를 안겨주어 전선을 대폭 북상시키면 다급해진 공산군이 휴전에 즉각 응할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신중했던 리지웨이는 공산군에게 치명타를 안기면 오히려 휴전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해 소규모 작전만 승인했다. 계속 고지전을 몰입하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밴 플리트는 아무리 생각해도 고지전이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워낙 많은 전투라고 봤다. 그래서 건의했던 계획이 기각당하자마자 일주일 만에 ‘추계작전’으로 단지 이름만 바꾼 공세 계획을 유엔군 사령부에 재차 올렸다.

BTS가 지난해 10월 밴플리트상 수상 소감을 밝히고 있다. Korea society 유튜브 영상 캡처

BTS가 지난해 10월 밴플리트상 수상 소감을 밝히고 있다. Korea society 유튜브 영상 캡처

리지웨이는 밴 플리트의 집요함에 놀랐으나 또다시 거부했고 결국 그의 의지는 무산되었다. 당시 전황을 고려한다면 밴 플리트의 생각은 상당히 합리적이었고 성공 가능성도 높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만일 그의 구상대로 작전을 했다면 휴전선은 39도선 부근에서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비록 통일까지는 아니었어도 좀 더 유리한 위치에서 전쟁을 이끌 수 있었던 기회가 상실된 아쉬웠던 순간이었다.

BTS 발언에 감정을 드러낸 중국의 행동은 세계적으로 엄청난 조롱을 받았다. 어쩌면 당시 밴 플리트가 너무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기에 그렇게 어이없는 반응을 보인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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