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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 제로의 진혼 나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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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임종주
임종주 기자 중앙일보
임종주 워싱턴총국장

임종주 워싱턴총국장

뉴욕 맨해튼 남쪽. 폭포수가 눈물을 쏟아내듯 9m 아래로 수직 낙하한다. 사방에서 떨어진 물줄기는 잠시 숨을 고르고 심연으로 빨려 들어간다. 채워지지 않는 무한의 공간은 월스트리트의 번잡한 소음을 고요와 정적으로 바꿔놓는다. 3000명에 가까운 이름이 청동 난간에 아로새겨진 9·11 테러 희생자 추모의 연못이다.

환갑의 소방관 줄리우스 폰테코르보씨를 마주친 곳은 남쪽 연못 앞이었다. 뉴욕 소방국 공식 나팔수이기도 한 그는 지난 9·11 20주년 추모 행사에서 진혼의 트럼펫을 불었다. 그렇게 먼저 간 동료들의 넋을 해마다 달랬다고 한다. 참극의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후 구조 영웅들을 잊은 적은 한시도 없다고 했다. 그때는 미국이 하나로 똘똘 뭉친 시기였다며 일치단결의 옛 기억도 그리워했다.

9·11 테러 20주년 추모 현장에서 진혼나팔을 불고 있는 뉴욕시 소방관 줄리우스 폰테코르보. 이광조 기자

9·11 테러 20주년 추모 현장에서 진혼나팔을 불고 있는 뉴욕시 소방관 줄리우스 폰테코르보. 이광조 기자

바이든 대통령은 오바마, 클린턴 두 전임자와 세계무역센터 자리였던 그라운드 제로 추모식에 나란히 참석했다. 영상 메시지를 통해 9·11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자 미국의 가장 큰 힘은 단결이라며, 다시 뭉치자고 호소했다. 재임 중 참사를 겪은 부시 전 대통령은 또 다른 테러 현장인 펜실베이니아 섕크스빌로 가 미국이 보여준 결속의 역사를 상기시키며, 분노의 정치를 그만두자고 역설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추모 현장에 없었다. 대신 뉴욕 경찰서와 소방서로 발길을 돌려 바이든 정부의 아프가니스탄 철군 혼란을 맹비난했다. 간간이 군중의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근무 중에는 정치적 구호가 담긴 복장을 금지한 규정을 어기고, 트럼프 캠프의 상징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모자를 쓴 소방관도 목격됐다.

그리고 일주일 뒤 워싱턴 연방의사당을 철조망이 다시 겹겹이 에워쌌다. 진입로가 폐쇄되고 방위군은 비상 대기 태세에 들어갔다. 지난 1월 의사당 폭동 사태 이후 8개월 만에 열린 보수 우익 단체의 집회 때문이다. 참가자들은 기소된 시위대 600여 명 대부분이 정치범이고 양심수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집회는 평화적으로 마무리 됐지만, 폭동의 상흔은 여전히 넓고 깊다.

9·11에 즈음해 미국 주요 언론이 내놓은 여론조사에서 미국이 단합돼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11%에 불과했다. 반면에 대다수인 88%는 크게 분열돼 있다고 답했다(AP통신 조사). 또 63%는 미국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대답했다(NBC 조사). 긍정적 비율이 72%에 달했던 20년 전 조사와는 결과가 판이하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단결의 외침은 크고 절박하다. 좌우 이념과 인종 차별 등으로 갈라진 미국 사회의 역설이다. 단합의 시절을 되뇐 노장 소방관의 진혼 나팔은 그래서 어느 때보다 따끔한 일침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