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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호동의 실크로드에 길을 묻다

1300년 전 몽골초원 누빈 위구르인, 그들의 앞날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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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동서교역의 중심지 ‘신장’

초강대국을 꿈꾸는 중국 정부가 최근 국제 사회의 이런저런 비판을 받고 있다. 그중 중국 당국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대목은 아마 타이완·홍콩과 더불어 신장(新疆) 문제일 것이다. 중국은 이 세 지역 모두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자국 영토의 일부며, 미국을 비롯한 다른 어느 나라도 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라며 완고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중국 신장위구르 자치구 투르판에 남아 있는 베제클릭 33호굴 서원화(誓願畵) 단편. 부처가 되고 싶은 염원을 담은 그림으로, 위구르 귀족 두 명의 모습이 보인다. 이목구비와 복식, 혁대 등 당시 위구르인의 특징을 보여준다. 10~12세기 제작.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포토, 김호동 교수]

중국 신장위구르 자치구 투르판에 남아 있는 베제클릭 33호굴 서원화(誓願畵) 단편. 부처가 되고 싶은 염원을 담은 그림으로, 위구르 귀족 두 명의 모습이 보인다. 이목구비와 복식, 혁대 등 당시 위구르인의 특징을 보여준다. 10~12세기 제작.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포토, 김호동 교수]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세 지역이 중국과 맺어온 역사적 관계는 확연하게 다르다. 이러한 차이를 무시하고 이들 세 곳을 동일한 맥락에서 논의하면 곤란하다. 타이완과 홍콩은 필자의 전문 영역이 아니므로 논외로 돌리더라도, 신장은 실크로드가 경유하는 중앙아시아의 중요한 영역이기에 그 역사적 굴곡을 살펴보려 한다. 신장이라는 지역, 그곳에 살고 있는 위구르인의 부침은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72년 전 중국 인민군에 영토 편입
청나라 지배 이후 독립운동 계속
회흘·회회·투르키 등으로 불려
불교·이슬람 등 다양한 문화 일궈

한반도 8배 크기, 중국 최대 자치구

몽골에 남아 있는 고대 위구르 유목제국의 수도 카라발가순 성터 유적지.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포토, 김호동 교수]

몽골에 남아 있는 고대 위구르 유목제국의 수도 카라발가순 성터 유적지.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포토, 김호동 교수]

우선 신장이라는 지역과 위구르라는 민족은 우리에게 비교적 낯선 명칭이다. 간략하게 소개해본다. 신장은 ‘신강(新疆)’의 한자 발음인데, 문자 그대로 ‘새로운 강역’이다. 1700년대 중반 청나라 건륭제가 이곳을 정복하고 영토로 새로 편입한 뒤에 붙여진 이름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전에는 신장이란 명칭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서역’이라는 아주 막연하고 광범위한 개념의 일부로 인식됐을 뿐이다. 한(漢)·당(唐)과 같은 한족 왕조가 이곳을 지배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단기간에 그쳤다. 이 지역이 고대 이래 줄곧 중국 영토였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현재 이 지역은 중국의 다른 많은 성(省)과 달리 소수민족 거주 지역이라고 해서 ‘자치구(自治區)’라 불린다. ‘신장위구르 자치구’는 중국의 최대 지방행정 단위다. 크기가 한반도의 8배, 남한의 16배에 달한다. 주민은 2600만 명 정도다. 이 중 45%, 즉 1200만 명이 위구르족이다. 한족이 42%로 약 1000만 명에 이른다. 카자크·키르기스·몽골·만주 등 다른 소수 민족이 나머지를 채우고 있다. 서쪽으로 세계의 지붕이라 일컫는 파미르 고원을 경계로 구(舊)소련령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접경하고 있으며, 예전엔 실크로드가 관통하는 동서 교류의 중심지였다.

천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투르판 위구르족 아이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포토, 김호동 교수]

천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투르판 위구르족 아이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포토, 김호동 교수]

위구르족은 언제부터 신장에 살고 있었던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지 않다. 이곳 주민들에 ‘위구르’라는 공식 명칭이 붙여진 것은 놀랍게도 불과 100년 전이다. 1921년 타슈켄트에서 소련 공산당 주최로 중앙아시아 소수민족 대표회의가 열렸는데, 당시 신장을 대표해서 참석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구르(Uyghur)’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그 이전까지는 ‘투르키(Turki·투르크인)’라고 불렸다.

위구르라는 이름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1000여 년 전 몽골리아 초원에 살았던 위구르라는 유목 민족에서 따왔다. 744년 몽골 초원에 강력한 유목 제국이 들어섰다. 위구르 부족이 세운 것으로, 남쪽으로는 번영을 구가하던 당나라와 맞서게 됐다.

중국에서는 그들을 ‘회흘(回紇)’ 혹은 ‘회골(回鶻)’이라고 불렀다. 물론 위구르라는 발음을 표기한 것이다. 그런데 양귀비에 빠진 현종이 국정을 소홀히 하면서 당나라는 급속하게 혼란에 빠져들었고, 마침내 755년 안녹산의 반란이 터지면서 국운은 그야말로 풍전등화 처지가 됐다. 자력으로 사태를 수습할 수 없었던 조정은 북방의 신흥 제국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에 호응한 위구르의 왕자는 불과 기병 4000여 명을 이끌고 내려와, 반군이 점령하고 있던 장안과 낙양을 순식간에 수복했다.

당나라 위협하는 강력한 제국 완성

결국 당나라는 기사회생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는 혹독하기만 했다. 낙양은 철저히 약탈당했고, 현종의 뒤를 이은 숙종의 어린 딸은 위구르 제국의 군주(카간)에게 시집을 가야 했다. 위구르인이 요구하는 조건대로 말과 비단을 교환하는 불공정한 견마(絹馬)무역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당 제국을 좌지우지하던 위구르 제국은 840년 전후해서 급작스럽게 붕괴하고 말았다. 상당수 유민이 남쪽으로 이주했고 그중 일부가 바로 오늘날 신장 지역으로 내려오게 됐다. 특히 신장 동부의 투르판에 독립된 왕국을 세웠는데, 역사상 고창(高昌) 위구르라 불리게 됐다.

신장위구르 자치구

신장위구르 자치구

예전 초원에 활동했을 때 소그드 국제상인들의 영향을 받아 마니교를 믿던 위구르인은 신장으로 내려온 뒤 불교도로 개종했다. 오늘날 투르판의 베제클릭(Bezeklik)이나 쿠차의 키질(Qizil)과 같은 천불동에는 그들이 남긴 수많은 불교 벽화와 조각이 발견된다.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중앙아시아 유물도 바로 이곳에서 수집된 것이다.

신장으로 내려온 위구르인은 과거와 같은 유목생활을 버리고 농경민으로 바뀌었다. 초원에 살던 다른 투르크계 유목집단도 그 대열에 합류하면서 이주민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났다. 신장에 살던 인도·이란 계통의 토착민은 이들과 섞이면서 서서히 동화돼 갔다. 신장의 ‘투르크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서방에서 도래한 이슬람교의 영향력도 차츰 증대하면서 주민들은 불교에서 다시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11세기 후반경이 되면 신장의 ‘이슬람화’가 거의 완성을 보게 된다.

중국에서 ‘회골’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위구르인은 신장으로 이주해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에는 ‘회회(回回)’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들은 대부분 무슬림이었기 때문에 회회라는 명칭은 다른 지역에서 온 무슬림, 즉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에게도 무차별적으로 적용됐다. 회화라는 이름만 하나로는 그가 어느 지역 출신인지 정확하게 판별하기 어렵다. 고려가요 ‘쌍화점’에 등장하는 ‘회회아비’도 정확한 국적을 알 수 없다.

신장 지역 투르크계 무슬림은 그 후로도 줄곧 자신들의 독자적인 왕국을 유지하고 있었다. 몽골제국이 세워진 뒤 앞서 언급한 신장 동부의 고창 왕국은 그 복속국으로 남았지만, 칭기즈칸의 둘째 아들인 차가다이와 그의 후손들은 신장 지역 대부분을 지배하는 왕국을 건설했다. 몽골인이었던 그들 역시 다수의 투르크인에게 동화됐다. 이들이 정치적 독립을 상실한 것은 18세기 중반 청 제국에 의해 정복된 이후의 일이다. 하지만 만주어로 ‘다이칭 구룬(大淸國)’이라 불린 청조는 결코 한·당·송·명과 같은 한족 왕조가 아니었다.

신해혁명 이후 무슬림 국가 건설도

이슬람의 성지 메카를 향해 예배를 드리고 있는 위구르 무슬림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포토, 김호동 교수]

이슬람의 성지 메카를 향해 예배를 드리고 있는 위구르 무슬림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포토, 김호동 교수]

이 점에서는 몽골이 세운 대원 제국도 마찬가지다. 청조는 만주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다민족 제국이었고, 신장은 이 연방제국의 일부였을 뿐이었다. 따라서 청의 정치체제가 한족 중심으로 바뀌고 마침내 1911년 신해혁명으로 무너지자, 위구르·티베트·몽골과 같은 민족들이 각자 독립의 길을 모색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신장 위구르인의 독립운동은 청 정복 직후부터 시작됐다. 마침내 1864년에는 신장 전역이 청의 지배를 벗어던지고 독자적인 무슬림 국가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야쿱 벡이라는 인물이 건립한 이 나라는 10년 남짓 존속하다가 다시 청에 의해 정복되고 말았지만, 중국에서 독립하려는 투쟁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청이 무너진 뒤 신장 각지에서는 현지 투르크 무슬림이 주도하는 독립운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1949년 중국 공산당 인민해방군이 신장에 진입함으로써 이들의 모든 노력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독립운동을 이끌던 지도층은 분열됐다. 일부는 중공 정권에 협력했지만 다른 일부는 소련이나 터키 등지로 망명의 길을 택했다.

신장이 최종적으로 중공 정권에 편입된 이래 지금까지 7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오늘날 중국의 신장 지배는 과거 한나라나 당나라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철저하고 조밀해 보인다. 한족의 숫자가 주민의 40%를 넘고 있다는 사실도 전례 없는 일이다. 역사적으로 실크로드의 주역이었던 신장의 위구르인은 현재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로 남게 됐다.

현재 중국의 입장은 단호하다. 신장의 독립을 절대 용인하지 않고 있다. 반면 이에 저항하는 위구르인의 움직임 또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신장 위구르인의 미래를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