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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거울속 낯선 사람’ 갱년기는 일시적, 속도 조절 시간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현주의 즐거운 갱년기(72)

한 두 해 전부터 친구들과 만나면 늘 하는 이야기가 있다.
“요즘 몸은 어때?”

대부분의 친구가 갱년기를 본격적으로 겪고 있는 중이라 각자의 상태를 공유하며 앞으로를 예측하고 서로의 경험과 극복담을 나누며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컨디션 추스를 방법을 찾아본다.

“해가 떠 있는 시간에 밖에 나다니는 일이 없으니, 이럴 때일수록 비타민 D와 아연을 챙겨 먹어야 해. 내가 좋은 건기식 하나 추천해줄게”, “요즘 구독형 식단을 해 보고 있는데 나쁘지 않은 것 같더라. 야채와 단백질을 골고루 챙겨 먹는 게 쉽지 않잖아”, “오후부터는 커피를 안 마시고 있어. 가뜩이나 잠을 설치는데, 컨디션 유지하려면 커피는 오전에만!”….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기력이 떨어지고 피곤하다’, ‘조절하며 먹고 있는데도 살이 계속 찌고 있다’, ‘갑자기 확 열이 오르는 일이 많아 선풍기를 늘 꺼내놓고 지낸다’ 등 공통점을 찾기도 하고, 완경 여부에 따라 체감하는 증상의 차이를 발견하기도 한다.

갱년기의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으면 든든하다. 친구들을 통해 위로도 위안도 희망도 얻게 된다. [사진 Priscilla Du Preez on unsplash]

갱년기의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으면 든든하다. 친구들을 통해 위로도 위안도 희망도 얻게 된다. [사진 Priscilla Du Preez on unsplash]

몸의 변화만 있는 건 아니다. 앞서 말한 피로감과 함께 어떤 일에도 마음이 동하지 않고, 특별히 기대되거나 신나는 일도 없으며, 축 처져 있기 일수라는 이야기도 자주 나눈다. 깜빡 잊는 건망증은 말할 필요도 없다. ‘맞아, 예전 같지 않아’라며 동조하거나 ‘너무 걱정하지 마, 나이가 들면 누구나 그래’라며 위안을 전하기는 하나, 팽팽한 긴장감으로 눈을 반짝이며 일을 벌여왔던 친구의 이전 모습을 떠올리면 씁쓸해지곤 한다. 물론 나를 바라보는 친구들 역시 그렇게 느꼈을 거다. 아, 여기서 비슷한 컨디션이라고 이야기하는 친구들은 여자다. 내 나이 또래 남사친들은 아직은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시간을 내서라도 취미활동에 빠지고 싶다고 하니 확실히 남자의 갱년기 시기와 증상은 여자와 다른 듯하다.

호르몬과 관련된 정보나 책들을 읽어 보면 에스트로젠이 줄게 되면, 세로토닌처럼 뇌 안에서 작용하는 신경전달물질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때가 있다고 한다.

“세로토닌 부족은 인지 기능저하나 우울증과도 관련이 깊으므로 갱년기에는 일시적인 건망증, 기분 저하, 수면 장애 등이 증가한다. 또한 이 시기는 가정과 직장에서도 고민이 많아지는 때다. 젊을 때보다 기력이 떨어지는 데 해야 할 일은 늘어나고 더군다나 내용도 녹록지 않을 때가 많다. 하나둘이면 어떻게든 감당하겠지만 여러 증상이 한 번에 겹치면 더는 버텨내기 힘들어 우울증에 빠지고 만다. 갱년기 우울증은 여성 호르몬 감소라는 생리적 변화에 사회심리적인 이유가 더해져 발병하는 일시적인 기분 장애라고 할 수 있다.”-『친절한 여성 호르몬 교과서』(북라이프) 중

‘사회 심리적 이유가 더해진다’는 것에 납득이 간다. 50대가 되니 가족이나 친지 등 가까운 사람의 병환이나 사망을 경험하는 일이 많아진다. 직장생활의 긴장감 높아지거나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경제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현실을 마주한다. 성장한 자녀가 더 이상 품 안의 아이가 아니라는 자각을 하게 되고, 나이 드신 부모님을 본격적으로 돌보는 시기에 돌입한다. 슬픔, 무기력, 우울과 불안을 느끼게 되니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목한 부분은 ‘일시적인’이란 문구다. 앞으로도 계속되는 상태가 아닌 호르몬의 변동기에 생기는 잠시의 현상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아진다(물론 생활의 변화 등의 노력으로도 치유가 안 되고 지속해서 상태가 나빠진다고 판단이 들면 병원에서 상담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

실제로 최근 만난 몇몇 친구에게 비슷한 신호를 느꼈다. 최근 1~2년 동안 ‘하는 일이 심리적으로 버겁다’, ‘함께 일하는 젊은 친구들과 소통하기 어렵다’, 그래서 ‘일을 빨리 정리하고 그만두는 게 좋겠다’는 말을 늘 해오던 친구는 회사 대표에게 업무 내용의 조정을 요청했고, 이후 마음의 여유를 찾은 듯했다. 아침마다 한 시간씩 한강을 걸으며 몸과 마음을 챙기기 시작했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더 많이 늘렸다.

며칠 전 만난 친구는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번 프로젝트의 평가가 좋아 두 번째 버전을 준비하는데, 지금부터 시작해 내년까지 진행할 예정이야. 평가가 좋았던 만큼 부담도 있지만, 잘 한번 만들어 보려고. 내가 좋아하는 주제의 일이라 기대가 돼”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하는 친구,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갱년기는 나이 듦을 인정하며 다시 추스려 방향을 잡을 터닝포인트의 시간이다. [사진 Filip Mroz on unsplash]

갱년기는 나이 듦을 인정하며 다시 추스려 방향을 잡을 터닝포인트의 시간이다. [사진 Filip Mroz on unsplash]

사업을 하는 또 다른 친구도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하던 일 마무리하는 대로 은퇴하는 게 바람이라고 이야기했던 친구다. 나보다 갱년기를 일찍 시작해 건강정보를 늘 전해주곤 했는데, 얼마 전 서울의 아파트에서 마당이 있는 경기도의 주택으로 이사를 하며 라이프스타일의 변화가 생겼다고 한다. “확실히 마음의 여유가 생겨. 출퇴근할 때 시간은 좀 더 걸리지만, 집에 들어가면 완전한 휴식을 할 수 있어. 동네 길냥이들 밥도 챙기면서 새 친구도 만들었어. 일하는 마음도 달라지더라고. 기운 차리고 본격적으로 달려볼 에너지가 생겼다고 할까.” 몇 달 전 회사에 투자를 받았고, 이후 직원을 더 채용해 신규 프로젝트를 개발 중이라고 말하는 친구의 목소리에 윤기가 돌았다. 다행이다, 계속 떨어지는 게 아니라 이렇게 새로운 방향으로 유턴할 수 있어서!

“한때는 친구였던 시간이 이제는 자신이 모르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요즘 읽고 있는 책에서 재미있는 구절을 발견했다. 삶의 각 단계에 필요한 철학적 사고를 담은 에세이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릭 와이너 지음/어크로스)에 실린 내용이다.

“어느 날 아침 시몬 드 보부아르는 매일 아침 그렇게 하듯 거울을 들여다보고 웬 낯선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사람은 누구지? 거울 속 여자는 눈썹은 눈 위로 흘러내렸고, 눈 밑에 다크서클이 깔렸으며, 광대는 지나치게 툭 튀어나오고, 주름 때문에 입가에 슬픈 기운이 감돌았다. 저 여자는 자신일 수 없었다. 하지만 저 여자는 내가 맞았다. ‘내가 여전히 나이면서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인가’, 보부아르는 궁금했다.”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이전과 달라 낯선 모습의 자신을 외면하거나 눈 감아 버리지 않고 꾸준히 바라보기. 달라진 것들 하나하나 되짚으며 약한 고리를 케어하기. 그렇게 나이 듦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펼쳐질 수 있는 또 다른 그림을 그려가기. 이런 속도 조절의 시간이 갱년기일 것이다! 나 스스로에게도 이렇게 격려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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