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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하는 인간, 전환의 길을 묻다> 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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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학교 출판문화원이 학교법인 경희학원 조인원 이사장의 연설문집을 펴냈다. 책의 제목은 〈희망하는 인간, 전환의 길을 묻다〉다. 삶과 정치의 담론과 실천을 탐색해 온 조인원 이사장의 시대적 문제의식이 연설문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인원 이사장은 가공할 첨단무기의 양산, 돌이킬 수 없는 기후 재앙와 환경파괴, 불평등 심화 등 실존적 위협 속에서, 파국을 헤쳐 갈 거대한 전환적 노력을 모색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생명과 자연이 상생,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의 미래를 여는 일은 이제 더 이상 피해 갈 수 없는 시대의 소명”임을 역설한다.

우리는 자유로움을 누린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행동한다. 하지만 이 세상엔 보이지 않는 하나의 틀이 있다. 세상 사람은 정해진 경계 안에서, 주어진 편견을 지닌 채 살아간다. 너도나도 끊임없는 욕망 속에서 생산과 소비에 빠져든다. 경쟁주의와 성장주의에 얽매여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간다.

경쟁과 쟁취, 성장과 팽창. 이 한쪽으로 치우친 흐름이 바로 산업문명의 틀이다. “시대를 풍미하는 현대의 기성 체제. 그 체제는 그간 ‘틀의 시대’를 만들어 왔습니다. 과도한 ‘성장과 욕망의 틀’ ‘왜곡과 정쟁의 틀’ ‘쟁취와 패권의 틀.’ 그 틀의 역사를 반복하면서 미래를 향한 위태로운 전진을 거듭해 왔습니다.” 조인원 이사장은 그 틀을 경계한다. 개인의 사유와 행위의 제약에서 머물지 않고 인류의 삶을 궁지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지역과 나라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자본과 상품의 물결. 점점 더 물화되어 가는 인간의 영혼. 더 많은 소유와 소비, 욕망의 덫과 함께 펼쳐지는 현대문명의 틀과 구속은 다양한 인간의 문제, 지구의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산업문명은 우리에게 풍요와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그 어두운 그림자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성장에서 소외된 이들은 빈곤과 기아에 시달린다. 갈등과 폭력은 끝이 보이지 않고 첨단 과학기술은 세계의 안보를 위태롭게 한다. 지구의 환경과 생태는 위기에 처했고 화석연료로 인한 기후변화는 재앙 수준이다. 각종 질병과 감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한마디로 인류사회를 뒤흔들 수 있는 문명사적 위기다. 올해 세계원자과학자협회는 지구 운명의 날 시계를 23시 58분 20초로 설정했다. 이제 인류에게 남은 시간은 100초뿐이다. 인류는 진화와 절멸, 희망과 굴복의 갈림길에 서 있다.

위기의 시대, 전환의 길은 어디에 있을까? 조인원 이사장은 세 가지 과업을 제안한다. 먼저 산업문명의 틀 너머를 상상하는 일이 필요하다. 당연시된 일상과 전혀 다른 세상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연민의 마음을 품는 것이 중요하다. 타자와 세계의 문제를 주시하면서 개인과 공동체, 인간과 대자연의 연결을 내면화한다. 마지막으로 상상과 연민, 연결을 통해 사회적 실천에 나서야 한다.

벗어나고 넘어서고 포괄하는 사유와 실천의 세계. 바로 포월의 정치다. “인위적 기성 현실의 범주를 넘어 현실의 또 다른 지평을 찾아 나서는 일입니다. 성찰과 소통, 통찰과 공명의 지대를 탐색하고 도모하는 일입니다. 자신을 표현하고, 타자와 관계 맺고, 나와 세계, 나와 우주의 열린 의미세계를 찾아 나서는 일. 그 일이 포월의 과업입니다. 우리는 이 과업을 통해 … 도래할 미래의 더 많은 가능성을 열 수 있습니다.”

포월은 ‘지금 이곳’의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서 벗어난다. ‘지금 이곳’을 성찰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는 ‘불가능의 가능성’의 인식론이며 세계관이다. 다시 말해 관습적인 사고의 틀을 타파하고 인간 내면의 양심과 가치, 진리세계의 무한한 가능성을 통해 현재는 물론 다가올 미래를 깨워 내는 초월적 역량의 실현과 연관된다. 따라서 포월의 세계관에는 과거 속에 현재가, 현재 속에 미래가 내재한다.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경험된 현재이며 미래는 다가올 현재인 것이다.

포월적 세계관을 실현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은 우주적 인간이다. “우주 속 ‘이 모든 것’의 근원은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안의 세계, 우리 안의 세계는 사회로, 자연으로, 우주로 연결돼 있습니다. 고금(古今)의 철학은 그런 전일적(全一的) 상호 연결의 통찰을 전합니다. 우주 창성과 변화에 대한 과학적 사유 또한 유사한 세계관을 말합니다. 그런 ‘위대한 발견’과 함께 인간은 무심한 자연의 냉정한 현실 속에서도 공감과 공명의 지대를 넓혀 왔습니다.” 인간은 우주적 자아다. 내 안의 세계는 우주 창성과 변화의 집적물이다. 따라서 인간은 새로운 나와 세상을 부르는 영감으로 지구적 차원의 특단의 조치를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는 포월적 사유와 실천의 주체일 수 있다. 조인원 이사장은 우주적 자아로서의 인간의 본성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 지구적 차원의 공적 책무를 감당해 나갈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현실정치에 포월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늘의 정치는 여전히 틀에 갇힌 채 경제 우선의 슬로건으로 탄소문명의 신화를 이어 간다. 권력투쟁에 경도돼 공적인 실천은 외면하고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다. 이런 상황에서 조인원 이사장은 대학의 역할을 강조한다. “미래세대를 위해 노력해 온 대학은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대학의 책무인 교육과 연구, 실천·봉사를 통해 문제해결을 위한 발걸음을 재촉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체험하는 문명사적 기회와 위기의 위태로운 교착 국면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일 것입니다.” 토인비의 말처럼 정치가 나서지 않으면 대학이 나서야 한다.

대학은 인류의 역사와 문명 창조를 위한 창조적 보편을 지향해야 한다. 다시 말해 포월의 인간형을 양성하는 곳이 돼야 한다. 전환기에 우리가 마주한 구원과 파멸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말하고, 인류가 공동 번영할 수 있는 열린 가치를 찾아 나서고, 지구사회 집단지성을 담대하게 구현하여 인류사회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열어 가야 하는 것이다.

물론 전환의 길은 쉽지 않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틈이 있다. 틀에 갇힌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서 ‘가능의 세계’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불가능의 예술이다.

인류문명을 위협하는 위기와 재앙, 이제 미래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현실엔 두 얼굴이 있습니다. 시대사조와 자신의 아성에 갇힌 현실. 인간과 우주, 미래로 열린 현실. 이 두 가지 현실이 공존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무엇을 선택할지는 우리의 몫입니다. 그 몫에 대한 인간의 책무를 다할 때, 우리는 더 큰 희망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결국 우리 안에 있다.

조인원 이사장의 문제의식은 산업문명이 가져온 물질적 풍요의 이면에 실존적 위협의 수준으로 엄습하고 있는 인간 소외, 양극화, 불평등, 생태계 파괴, 기후 위기 등의 현상에 대한 자각적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종말론적 혼돈에 대해 전환의 시대로 규정하고 근본적인 문명적 성찰과 초극을 위한 의식 혁명, 실천 혁명을 강조한다.

조인원 이사장의 전환 시대의 담론은 자연과학 이론은 물론 정치, 문화, 철학, 예술 등의 분야를 폭넓게 넘나들며 전개되는 특성을 보인다. 이러한 학문적 통섭은 문명적 전환기의 가시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가시적인 세계를 추동하고 변화시키는 비가시적인 세계의 역동을 입체적으로 통찰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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