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임진왜란 때 곽재우 의병장의 숨은 조연…죽유 오운

중앙일보

입력 2021.09.30 11:00

업데이트 2021.09.30 17:09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110)

임진왜란은 조선이 개국한 뒤 직면한 초유의 국난이었다. 그 시기 죽유(竹牖) 오운(吳澐·1540~1617)이란 문신이 있다. 그는 53세에 의령의 별장에서 임진왜란을 맞닥뜨린다. 광주 목사를 끝으로 벼슬에서 물러난 지 1년 반 정도가 흐른 뒤다. 죽유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처음 시작한 일은 의병장 곽재우의 재기를 돕는 것이었다.

죽유는 대의를 위해 실질적인 성과를 중시해야 한다는 실사구시 정신을 실천했다. 경북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 죽유종택 전경.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죽유는 대의를 위해 실질적인 성과를 중시해야 한다는 실사구시 정신을 실천했다. 경북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 죽유종택 전경.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곽재우는 4월 22일 고향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낙동강을 오가는 왜적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전쟁이 터진 뒤 열흘도 지나지 않아 경상우도가 왜적에 유린당한 데는 당시 경상감사 김수의 잘못이 컸다. 그는 임지인 진주에 있으면서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거창 등지로 도망 다니다가 전라감사 이광과 충청감사 윤국형이 근왕병(勤王兵. 임금이나 왕실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군인)을 일으킨다는 소식에 휘하 군사 100여 명을 이끌고 그쪽에 합세했다. 이처럼 방어선이 채 설치되지도 못하고 무너지자 왜적은 파죽지세로 곡창인 호남을 수중에 넣기 위해 경상우도로 밀려들었다. 곽재우 의병은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경상우도의 첫 봉기였다.

오운의 공조참의 교지.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오운의 공조참의 교지.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그러나 곽재우의 구국 활동은 김수와 경상병사 조대곤의 모함으로 거꾸로 토적(土賊. 지방에서 일어난 도적떼)으로 몰려 데리고 있던 장병들이 모두 흩어지는 위기에 봉착한다. 이에 실망한 곽재우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숨기로 했다. 그때 그는 의령의 마을을 지나다가 죽유를 만난다. 곽재우는 정3품 목사(牧使)를 역임한 죽유에 비하면 나이가 12세 아래인 데다 지위도 재야의 선비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공통분모가 있다면 둘 다 남명 조식의 제자에, 혼맥으로 서로 멀지 않은 인척인 사이였다.

이 만남에서 죽유는 곽재우의 창의(倡義. 의병을 일으킴)를 높이 평가하고 다시 일어설 것을 권유하며 자신의 전마(戰馬)와 건장한 종 6, 7명을 주었다. 이어 지역 유지들이 장정을 내놓도록 권유하고 곽재우를 의병장으로 재추대했다. 대신 자신은 선배지만 곽재우를 도와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낮춘 것이다. 좌절해 있던 곽재우에게 죽유는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오운이 저술한 역사서 『동사찬요(東史纂要)』의 목판. [사진 송의호]

오운이 저술한 역사서 『동사찬요(東史纂要)』의 목판. [사진 송의호]

이후 곽재우 의병은 낙동강 서쪽 경상우도의 여러 고을을 지키는데 큰 공을 세운다. 죽유는 이렇게 대의를 위해서는 모름지기 실질적인 성과를 중시해야 한다는 실사구시 정신을 실천해 보였다.

전란으로 죽유는 이어 학봉 김성일을 만난다. 그는 퇴계 이황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김성일이 초유사(招諭使)로 낯선 경상우도에 내려오자 소모관(召募官)을 맡아 그를 돕는다. 또 인근 지리와 제반 사정을 안내하고 지역 유림과 김성일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조연이 익명의 열정을 불태워야 영화는 성공한다. 죽유 오운은 이렇게 조연을 자처하며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난국을 헤쳐나가는데 기여한 문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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