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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3일… 하나된 독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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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독일 수도 베를린의 통일 축하 모임이 폭죽과 교회종소리와 국가제창으로 들뜬 분위기였던 것과는 달리 지난해 동독 민주화혁명의 진원지였던 라이프치히시는 흥분 못지 않게 걱정에 사로잡힌 다소 침체된 분위기로 서로 엇갈렸다. 통일의 날을 지켜보고 보내온 본지 두 특파원 글에 나타난 흥분 속의 베를린과 가라앉은 라이프치히의 모습은 축하 속의 독일통일의 장래와 그 명암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했다.<편집자주>
◎열기의 현장­브란덴부르크문/백만인파 몰려 최대의 잔치/시민들 “한반도에도 좋은 소식 있을 것”
【베를린=유재식특파원】 2일 오후 11시55분,베를린 빌헬름황제 기념교회에서 평화의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5분 뒤 두개의 독일이 하나됨을 축하는 종이다. 동시에 이 종은 분단과 갈등의 냉전을 영원히 종식시키는 함성이기도 했다.
『단결ㆍ정의ㆍ자유를 독일조국에….』
1990년 10월3일 0시,베를린의 구 제국의회의사당 앞 국기게양대에 검정ㆍ빨강ㆍ노랑의 대형 독일국기가 서서히 올라가면서 이곳 공화국 광장에 운집한 수만명의 군중들이 독일국가를 합창했다.
독일국민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조국의 통일이 실로 45년여 만에 이뤄지는 순간이다.
목소리들에는 엄숙함이 서려 있었고 옆자리에 서있던 한 노파(80)는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불꽃놀이에 함성
『…독일 조국이여 번영하라.』 합창이 끝나자 군중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헬무트」를 외쳐대기 시작했다. 단상에 귀빈으로 참석했던 헬무트 콜 총리가 입가에 웃음을 띠며 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했다.
통일독일의 초대 총리로서 그간 온갖 난관을 물리치고 오늘의 통일을 가능케 한 독일통일의 견인차 콜에 대한 성원과 감사의 연호였다.
이어 곳곳에서 샴페인 터지는 소리가 났고 바로 옆 브란덴부르크문 위로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인파에 밀려 브란덴부르크문까지 갔다. 발디딜틈 없기는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전장을 방불케할 정도로 매캐한 불꽃놀이 화약냄새 속에 모두들 함성을 지르며 독일국기를 흔들어댔다. 「도이치란트 위버 알레스」(세상에서 으뜸가는 독일)를 외치는 사람도 있었고 간간이 구 독일제국 깃발도 눈에 띄었다.
오전 1시쯤 되자 이윽고 군중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동쪽에 사는 사람은 동쪽으로,서쪽에 사는 사람은 서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4일간 각종 행사
브란덴부르크문 앞 광장이 듬성듬성해질 정도로 시민들이 줄어들 때쯤 기자도 서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인파가 흩어져서인지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남의 잔치에 들떴던 기분도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길거리에는 계속 수많은 인파가 이리저리 몰려다니면서 독일 역사상 최대의 잔치를 맘껏 축하하고 있었다.
거리 곳곳엔 깨진 술병이 즐비했고 젊은이들은 소리를 질러대며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지하철구내 벤치에는 술에 만취해 곯아떨어진 시민을 깨우는 경찰관의 모습이 보였다.
브란덴부르크문 근처의 맥주집에는 가족단위로,심지어는 어린이들까지 동반한 인파로 북적이며 조국통일을 축하했다.
이 맥주집에서 부인과 함께 맥주를 마시던 둑스씨(62)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과의 만남은 상징적이다. 그러나 두고 봐라. 한반도에도 분명히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
최근 남북한 총리가 서울에서 만났고 소련과의 수교도 발표됐다고 한반도의 사정을 잠깐 설명하자 옆에 앉았던 쉬니스케씨가 말을 이었다.
『독일통일을 가져다준 「산타클로스」는 고르바초프다. 소련과 수교를 했다면 머지않아 한국도 통일된다』며 장담을 했다.
이곳 저곳에서는 흥분한 목소리의 손님들이 「프로스트 아인하이트」(통일을 위해 건배)를 잇따라 외쳤다.
독일통일을 축하하는 각종 행사는 2일부터 4일까지 사흘 동안 베를린 등 독일 주요도시에서 펼쳐졌다. 특히 통일전야인 2일 밤 베를린에서는 약1백만명의 인파가 운터 덴 린덴가와 브란덴부르크문ㆍ구 제국의회 앞ㆍ공화국 광장 등에 모여 통일기념행사에 참석했다.
베를린시는 베를린경찰과 국경수비대 등 7천여명의 경찰을 동원,치안유지에 나섰으나 우려했던 극우파와 극좌파들의 충돌은 없었다.
◎“사라진 동독”… 착잡한 현지인들/요란한 춤파티 “대부분 서독서 온 사람”/“너무 빠른 통일”… 앞날에 불안
【라이프치히=배명복특파원】 동독이라는 한 나라가 영원히 지도에서 사라지고 엘베강 넘어 오데르강과 나이제강까지가 독일연방공화국이란 이름하에 하나가 된 3일 0시.
라이프치히시민들은 희열과 비감,희망과 불안이 교차된 묘한 이중감정 속에 독일통일의 역사적 순간을 맞이했다. 자신들이 몸담고 살아온 40여년 역사가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데 대한 허탈함과 함께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와 걱정이 뒤엉켜 말로 표현키 어려운 착잡한 표정들이었다.
과거 동독 제2의 도시로 작년 10월 철옹성같던 호네커정권을 붕괴시키는 대규모 민중시위의 진원지였던 라이프치히.
「우리는 국민」이라는 절규가 요란하던 카를 마르크스광장과 시장광장에 모인 5천여명의 시민. 『도이치란트』를 요란하게 외치며 폭죽을 터뜨리는 젊은이들도 있었지만 이들 군중 대부분은 조용히 통일의 순간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아직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는 마르크스의 동상 앞에 펄럭이는 대형 독일(서독)국기를 바라보고 있던 뵐러씨(37ㆍ엔지니어)는 『작년 가을 우리가 이곳에 모인 것은 동독정권의 민주화를 위해서였지,통일을 위해 모인 것은 아니었다』면서 『이렇게 빨리 통일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왕 통일이 될바에는 이렇게 된 것이 차라리 잘된 게 아니냐』는 질문에는 착잡한 표정만 지을 뿐 별 대답이 없다.
○“거만한 정복자들”
인구 60만명의 라이프치히. 동독정권하에서 실업률은 통계상으로 항상 0%였다. 그러나 지난 7월1일 동서독 화폐ㆍ경제통합과 함께 실업자가 크게 늘어 이미 5만명(8.3%)을 헤아리고 있다.
하루 4∼5시간만 일하는 반실업자까지 합하면 10만명이 넘는다고 3일 라이프치히 폴크스차이퉁은 보도하고 있다. 통일의 순간에도 한껏 웃을 수만은 없는 라이프치히시민들의 착잡함 속에는 새로운 실업에 대한 우려와 불안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서독기업들은 이곳에 들어와 돈벌 생각만 하지,우리를 위해 일자리를 만드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리나트씨(47ㆍ실업자)는 『통일 때문에 직장을 잃었다』며 흥분했다. 서독사람들은 동독사람들을 가리켜 「스스로 생각할줄 모르는 게으름뱅이들」이라고 비난하지만 동독사람들은 서독사람들을 「거만한 정복자」들이라고 비꼬고 있다.
이같은 서로에 대한 감정의 앙금을 대변하듯 이날 밤 라이프치히 시내 곳곳에서는 서독기업들이 주최하는 통일기념 댄스파티가 라이프치히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줄을 잇고 있었다. 카를 마르크스광장 맞은편에 있는 도이치란트호텔에서는 서독의 자툰보험회사가 여는 요란한 댄스파티가 벌어졌다.
「춤을 추며 통일로」라고 쓴 대형 현수막 아래에는 보험대리점을 모집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 호텔의 한 종업원은 「춤추는 사람의 대부분이 서독에서 온 사람들」이라며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통일의 순간을 기다리는 시민들 사이로 각종 금융상품을 소개하는 서독금융회사들의 선전차량이 돌아다니는가 하면 「10마르크만 내면 베를린관광을 시켜준다」며 한 서독 가구회사는 시민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3일 0시. 여기저기서 폭죽이 터지고 샴페인이 터졌다. 자동차 경적소리도 요란했다. 잠시후 대부분의 시민들은 담담히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일부 술취한 젊은이들의 떠드는 소리만이 텅빈 광장에 메아리졌다. 술병을 길바닥에 던져 깨고,기자를 향해 『외국인은 꺼져라』고 소리치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나치당 배지가 달려 있었다.
○병 깨는 젊은이도
그 시간 카를 마르크스광장 뒤편으로 고색창연하게 서 있는 성니콜라이교회에서는 「10월3일과 예수」라는 제목의 청년신도그룹 토론회가 열리고 있었다.
바흐가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한 것으로 유명한 이 교회는 작년 가을 라이프치히 민중시위를 있게 한 「성지」로도 잘 알려져 있는 곳.
청년그룹 토론 진행을 마치고 나온 포크트 전도사(26)는 『매우 우울하고 착잡한 분위기였다』고 이날 밤 토론의 모습을 설명했다.
『독일은 과거에 저지른 죄에도 불구하고 크나큰 신의 자비를 받았다. 독일은 그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문을 연 그는 『우리가 추구한 것은 동독도 서독도 아닌 제3의 가능성이었다』면서 『그러한 가능성을 찾아볼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이렇게 되고 말았다』는 아쉬움을 나타냈다.
◎올림픽 노래 『손에 손잡고』 인기/「독일 하나된 날」 거리표정/기민ㆍ사민당 재빨리 선거전 시작/「통일대목」 노린 포장마차들 성시
통일의 열기는 베를린거리에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2일 오후가 되자 경찰의 교통차단으로 보행자의 천국이 된 운터 덴 린덴가엔 베를린시민과 관광객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검정ㆍ빨강ㆍ노랑의 3색 풍선을 들고 엄마손 잡고 나온 아이,괴성을 지르며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10대들,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뜨거운 키스를 나누는 젊은이들,그리고 뇌성마비아들을 휠체어에 태우고 나온 노부부,모두가 통일을 축하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동ㆍ서독에서 온 14명의 소년들은 통일 독일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3일 0시(현지시간)가 되기 직전 교회의 타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베를린의 라이히슈탁 건물 앞에 흑ㆍ적ㆍ황의 독일 3색기를 게양하며 통일을 자축.
○…이날 알렉산데르광장에서 브란덴부르크문에 이르는 2㎞의 운터 덴 린덴가에는 14개의 대형무대가 설치돼 2천여명의 「예술가」들이 흥을 돋웠다.
거리 곳곳에서는 체코ㆍ헝가리ㆍ프랑스 등지에서 온 거리의 악사들이 나름대로 민속음악을 선보이며 모자를 내밀어 돈을 벌기도 했다.
한편 베를린거주 한인들이 만든 아리랑무용단도 오후 11시쯤 운터 덴 린덴가에서 우리 춤과 가락을 선사,박수를 받았다.
○…동구와 동독의 민주화 시위 때 시위 주제곡이 됐을 정도로 인기를 얻었던 88년 서울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를 부른 4인조 한국인 그룹 코리아나가 이날 오후 6시 알렉산데르광장에서 공연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불참.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로 이어지는 가사가 동독민주화와 베를린장벽 붕괴를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맞아떨어져 동독에서는 특히 코리아나의 인기가 높다.
○…오는 14일의 구 동독 5개주 지방의회선거와 12월2일의 총선을 의식한 듯 최근 동ㆍ서독간에 합당작업을 마친 기민당(CDU)과 사민당(SPD)은 거리에서도 치열한 「선거전」을 치렀다. SPD가 거리 곳곳에 통일축하 포스터를 붙이자 CDU는 곳곳에 「콜과 함께 민주에로」라는 현수막을 설치했다.
마르크스­엘겔스 광장 한 모퉁이에 CDU가 「통일카페」를 차리자 SPD는 바로 맞은편에 대형천막으로 카바레를 만들어 대응하는 등 축제의 열기와 함께 벌써부터 선거전의 열기도 달아오르고 있었다.
또 동독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연합90」은 2일 밤 촛불을 든 채 운터 덴 린덴가의 미ㆍ영ㆍ불ㆍ소 4개 전승국과 헝가리대사관을 순회,독일 통일에 힘이 되어준 데 대한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날 베를린시민들은 갖가지 기발한 방법을 동원,통일의 기쁨을 표시.
오후 6시 30분쯤 알렉산데르광장 분수대에서는 베슬러(19)라는 청년이 영상 10도정도의 쌀쌀한 날씨에 스트리킹. 그는 탑으로 된 분수대 꼭대기까기 올라가 『도이치란트』를 외쳐대 주위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축제의 참맛은 역시 먹고 마시는 것. 이날 운터 덴 린덴가의 길 양옆과 한가운데의 노랗게 물든 보리수들 사이사이에는 포장마차가 빽빽히 늘어서 「통일대목」을 노렸다. 가격은 평소보다 다소 비싼편이었으나 포장마차마다 인파로 초만원을 이뤘고 동전이 조금 모자라면 주인이 값을 깎아주는 등 선심을 쓰기도.
○…지난해말 민주혁명의 시발점이 됐던 동독의 라이프치히시에서는 3일 소수 극렬우익분자들이 난동을 부렸으며 시민들도 약 2천명만이 통일을 자축하러 거리에 나와 민주혁명 당시의 열띤 분위기와는 대조적.
50만명의 라이프치히시민들중 2천여명만이 거리에 나와 통일을 자축했으며 민주혁명 당시 시위대들로 가득찼던 카를 마르크스광장도 텅비어 다소 썰렁한 느낌.<베를린ㆍ라이프치히=유재식ㆍ배명복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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