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합의 엎은 韓에 앙금 "기시다 내년 7월 본색 드러낼것"

중앙일보

입력 2021.09.3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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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새 일본 총리가 될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자민당 신임 총재. [AFP=연합뉴스]

새 일본 총리가 될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자민당 신임 총재. [AFP=연합뉴스]

'쇄신'보다 '안정', '고노 보다 아베'.

일본 자민당 총재선거 결과의 두 키워드다. 사실상 총리(10월 4일 국회 결정)가 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는 흠도 없지만, 매력도 없는 무난한 정치인이다. 정책적으로도 성품적으로도 안정적이다. 외상도 했고, 자민당의 정책을 총괄하는 정조회장도 역임했다. 7대 주요파벌 중 5번째 파벌의 수장이기도 하다.

반면 1차 투표에서 1등을 했지만, 결선투표에서 고배를 마신 고노 다로(河野太郎)는 인기는 있지만, 인덕은 없는 정치인이다. 자민당 주류와 타협하지 않고 소신을 꺾지 않는 모습이 과거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를 연상케 하지만, 의원들이나 산업계 등 자민당 기득권 세력에겐 그게 '비호감'의 이유가 됐다.

그걸 파고든 게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였다. 초반 압도적 우위가 점쳐지던 고노가 선거전 중반부터 쳐지기 시작한 건 '고노가 되면 좌충우돌하다 1년도 못 간다'는 아베 측의 전면 공세가 의원들에게 먹히기 시작하면서다.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노다 세이코(野田聖子)의 출마를 독려해 1차 표를 분산시킨 뒤 결선투표에서 '반 고노' 연합으로 승리한다는, 노회한 승부수가 적중했다. 고노가 되면 세대교체 바람으로 뒷방으로 물러날 것이라 두려워한 아베의 막판 저력이 고노의 '바람몰이'를 제압한 모양새다. '불사조' 아베는 일본 정치의 막후 실세로 남게 됐다.

29일 치러진 일본 자민당총재 선거 출마자들. 왼쪽부터 고노 다로(河野太郞) 행정개혁담당상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전 정무조사회장(정조회장),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전 총무상, 노다 세이코(野田聖子) 간사장 대행이다. 당선된 기시다 신임 총재는 10월 4일 열리는 임시국회에서 중·참의원 표 결을 거쳐 일본의 100대 총리가 된다.[AP=연합뉴스]

29일 치러진 일본 자민당총재 선거 출마자들. 왼쪽부터 고노 다로(河野太郞) 행정개혁담당상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전 정무조사회장(정조회장),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전 총무상, 노다 세이코(野田聖子) 간사장 대행이다. 당선된 기시다 신임 총재는 10월 4일 열리는 임시국회에서 중·참의원 표 결을 거쳐 일본의 100대 총리가 된다.[AP=연합뉴스]

기시다 총리 시대의 최대 관심사는 한·일 관계다. 최근 기시다 총재 당선자와 독대한 한 인사는 "한·일 관계는 크게 ^내년 7월 참의원 선거까지의 안전운전 1단계 ^이후의 '기시다 본색 드러내기'의 2단계로 나눠 진행될 것"이라 예상했다. 장기 정권 여부를 결정지을 내년 7월의 참의원 선거까지는 AA(아베-아소)의 의향을 존중하며 코로나 극복을 최우선하는 신중한 정권 운용을 할 수밖에 없다.

"자민당뿐 아니라 일본 국민도 한·일 관계를 조속히 개선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다"(진창수 세종연구소 연구위원)"는 현실적 요인도 있다. 박철희 서울대 교수는 "'관리'는 하되, '외교 리스크'가 될 만한 것을 기시다가 먼저 나서서 모험하진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다만 한국에 새 정부가 들어서고, 기시다도 참의원 선거를 성공적으로 마치면 AA의 영향에서 벗어나 본래의 DNA인 '비둘기 외교'로 방향을 틀 여지가 생길 수 있다.

2016년 12월 28일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기시다 후미오 당시 일본 외상이 위안부 문제 해결방안을 찾는 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2016년 12월 28일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기시다 후미오 당시 일본 외상이 위안부 문제 해결방안을 찾는 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또 다른 기시다 측근도 29일 본지에 "한국과의 관계는 속도조절할 것"이라 말했다. 다만 그 이유를 선거나 일본 내 여론이 아닌 문재인 정부의 위안부 합의 파기에 대한 '악연' 때문이라 지적했다. 흔히 한국에선 기시다가 위안부 합의 당시 외상이라 한·일 관계에 관심과 애정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실제는 다르다는 설명이다. 당시 상황을 간단히 복기하면 이랬다.

합의 나흘 전인 12월 24일 당시 아베 총리는 기시다 외상에게 '일 정부는 책임을 통감'이란 표현이 담긴 합의문에 난색을 보였다. 기시다는 "여기서 매듭을 지고 가야 한다. 미래를 생각했을 때 지금 합의하지 않으면 일·한관계는 표류한다"고 맞섰다. 결국 아베는 '고(Go)사인'을 냈다. 그럼에도 불안했던 아베는 합의 전날 밤에도 기시다에 전화를 걸어 "정말 이대로 해도 되는 거냐"라며 다짐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이 합의가 사실상 파기되자 기시다는 일본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기시다는 요즘도 사석에서 "'사다리가 치워졌다'(애써서 했는데 나중에 고립됐다는 일본 특유의 표현)"는 말을 종종 한다. 아직 마음의 응어리가 있다. 그는 강제징용자 문제에 대해서도 지난해 12월 산케이와의 인터뷰에서 "그건 국제법과 조약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의 문제다. 일본이 양보할 여지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미국이 '(한·일이) 사이좋게 지내라'고 한들 (일본의) 정론을 양보할 순 없다"는 말도 했다. 공은 어디까지 한국에 있다는 것이다.

기시다의 트라우마는 역발상이 가능한 부분이다. 내년 들어설 한국의 새 정부가 '위안부 합의 복원'이란 카드를 통해 징용자 문제까지 패키지로 해결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길 수 있다. 문재인 정부도 임기 말 들어 위안부 합의는 유효하다는 입장으로 선회한 만큼 그 시기를 앞당길 수도 있다. 다만 한가지 변수는 강제 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에 따른 '현금화'란 폭탄이다. 이게 조기에 터지면 한·일 관계 개선은 요원해질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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