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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참으로 꾸준한 문재인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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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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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여전 일이다. 정상회담 때마다 A4 용지를 들고 대본 읽듯 하는 게 안타까워 '트럼프의 입, 문재인의 A4 용지'란 칼럼을 썼다. "짧은 모두발언까지 외우지 못하거나, 소화해 발언하지 못하는 건 문제다. 지도자의 권위, 신뢰까지 떨어뜨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칼럼이 나가자 당시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강하게 반박했다. 대충 세 가지 주장이었다. "'내가 이만큼 준비를 철저하게 해왔다'는 성의 표시다", "문 대통령의 권위와 자질로 여기까지 왔다","문 대통령이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했다." 어처구니없었지만 "앞으로 노력은 하겠지라고 믿었다. 순진한 기대였다. 최근 유엔에서의 존슨 영국 총리, 응우옌 베트남 주석과의 회담 장면은 외신에도 유튜브에도 흘렀다. "오늘 정상회담을 계기로 양국 우호 협력관계가 더욱 발전하길 기원합니다." "올 초 전당대회에서 국가주석으로 선출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런 대목까지 쭉 A4용지를 보고 읽는 걸 보고 깨달았다. "아, 참으로 꾸준한 대통령이구나."

꾸준한 건 또 있다. 먼저 북한에 대한 끊임없는 구애. 문 대통령은 이번 유엔총회에서 종전선언을 제안했다. 2018, 2020년에 이어 세 번째. "평화협상으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일관된 주장이다. 하지만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 상대국인 미국은 종전선언을 입구에 두지 않는다. 이쪽도 하노이 노딜 이후 일관돼 있다. 접점이 없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외친다.

아직도 정상회담에서 A4 읽고,
시종일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외교적 센스 없음, 뻔뻔함도 꾸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꾸준함도 놀랍다. 북한이 순항미사일과 탄도미사일 도발을 이어가고, IAEA가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전력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경고해도 끝까지 '저강도 긴장 고조'란다. 새로 개발한 극초음속 미사일 '화성-8형'을 시험 발사해도 '유감' 뿐이다. 북 도발은 안 보고, 말 않고, 듣지 않는다. 반면 김여정의 '긍정 담화' 한마디에는 반색한다. 적대시 정책 철회, 제재완화 같은 '조건부'가 달려있는데도 '뒷말'만 보고 환호한다. 언제부터 김여정 담화에 "미국산 앵무새" "꼴불견" "우몽하기 짝이 없다" 같은 욕설이나 막말만 없으면, 그게 바로 '의미있는 담화' '좋은 신호'로 해석되게 된 것일까. 외교의 대가 헨리 키신저는 "지도자가 할 일은 자신의 이상과 국가가 놓인 현실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라 했다. 냉엄한 진리다. 돌이켜보자. 지난 4년 반 동안 대북, 대일, 대미 외교 단 하나라도 '문재인 다리'가 있기는 했는가.

문 대통령의 이번 뉴욕 외교는 '방탄외교'였다. 곁에는 늘 BTS가 함께 했다. 임기 내내 꾸준히 BTS를 활용했다. BTS가 기특하고 안쓰럽다. 이와 비슷한 시기 워싱턴에서는 역사적인 '가치외교'의 큰 장이 열렸다. 쿼드(Quad) 4개국(미국·일본·호주·인도) 정상이 처음으로 한 데 모였다.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대 중국 견제' 협의체다. 비동맹국 인도가 동맹국 한국의 자리를 차지했다. 협력분야는 첨단기술에서 우주 분야까지 망라한다. 모임도 매년 정기화됐다. 뉴욕까지 건너간 문 대통령을 만나지 않고, 1주일 후면 총리를 퇴임하는 스가 일본 총리에겐 "제발 워싱턴에 와 달라"고 하소연한 바이든 미 대통령의 의중은 뭘까. 아프간 철수로 곤경에 처한 바이든으로선 신 동맹 쿼드의 단결 과시가 중요하지, 태도 하나 바뀌지 않은 북한과의 대화, 꾸준히 다른 소리를 내는 한국의 종전선언 제안에 눈 돌릴 여유 따윈 없는 게다. 문 대통령이 서 있을 자리는 워싱턴이었다.

지난 24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쿼드의 첫 대면 정상회의. 왼쪽 국기대 앞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그 오른쪽으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 [AP 연합]

지난 24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쿼드의 첫 대면 정상회의. 왼쪽 국기대 앞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그 오른쪽으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 [AP 연합]

중국 눈치를 살피는 문재인 정부는 그동안 "쿼드 가입을 제안받은 적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거리두기를 해 왔다. 그런데 이 말이 정말 현실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한국의 외교장관이란 자가 "중국의 공세외교는 자연스럽다"고 대놓고 반복하고, 중국의 관영 환구시보가 이를 극찬하고 나서는 지경이니 말이다. 외교적 센스 없음, 뻔뻔함도 참으로 꾸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