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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퍼스펙티브

맑고 때때로 구름…다시 시험대 오른 K반도체 신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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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제2의 반도체 춘추 전국시대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달 모건 스탠리가 ‘반도체 시장에 겨울이 오고 있다’는 리포트를 발표한 이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가 휘청거리고 있다. 반도체 수퍼 사이클의 후반기에 진입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길게 보면 반도체 춘추전국 시대가 다시 열리는 조짐이다. 한국 반도체(K반도체)에 자욱했던 중국발 공포가 걷히고 맑은 하늘이 보이는가 싶더니 다시 미국발 먹구름이 몰려오는 중이다.

불과 3~4년 전만 해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불안한 시선은 온통 서쪽을 향했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 때문이었다. 중국은 2015년 ‘중국 제조 2025’의 청사진을 발표한 이후 당시 15%였던 반도체 자급률을 2025년까지 70%로 끌어올리겠다는 무시무시한 목표를 밀어붙였다. K반도체에 최대 위협이었다. 다행히 이 먹구름은 큰비를 뿌리지 않고 지나갔다.

중국 반도체 굴기 좌절로 안도
미국 새 반도체 패권 전략 위협
핵심 집중과 치밀한 반격으로
다가올 반도체 겨울 헤쳐가야

지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신경은 미국을 향해 곤두서 있다. 미국 존 바이든 행정부의 세계 패권 전략에서 반도체가 새로운 화약고가 됐기 때문이다. 백악관은 벌써 세 차례나 세계 주요 반도체 업체들을 불러들여 매출과 수주 및 재고 현황 등 사실상 경영 정보 일체를 제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K반도체에 새로운 위기와 도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한풀 꺾인 중국의 반도체 굴기

이철호의 퍼스펙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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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반도체 굴기’의 하이라이트는 2018년 4월 26일 시진핑 국가주석의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 공장 방문이었다. YMTC는 칭화대가 세운 국유 반도체 그룹 ‘칭화유니’의 자회사. 시 주석은 현장에서 ‘반도체 심장론’을 선언했다. “반도체는 사람의 심장과 같다. 심장이 약하면 덩치가 아무리 커도 강하다고 할 수 없다”며 반도체 굴기에 예산 1조 위안(약 170조원)을 쏟아붓겠다고 밝혔다. 이후 중국 반도체는 한국·미국·일본·대만에서 엄청난 전문 인력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됐다.

하지만 중국의 속도전은 미국의 화웨이 제재로 직격탄을 맞았다. 제재의 핵심은 반도체였다. 당시 세계 스마트폰 출하량 1위였던 화웨이는 이에 맞서 독자적인 운영 체제 ‘훙멍(鴻蒙·하모니)’을 개발해 홀로서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두뇌이자 핵심 반도체인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에 가로막혔다. 화웨이는 중국 정부의 전방위적인 지원사격에도 불구하고 시장 점유율이 41%대에서 10% 이하로 곤두박질했다.

아직 현재진행형인 중국의 야망

이뿐이 아니다. 미국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막기 위해 고성능 반도체의 핵심 장비인 네덜란드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기’ 대중 수출을 봉쇄했다. 반도체 설계, 고성능 반도체 칩의 대중 위탁생산도 막았다. 이 유탄에 맞아 칭화유니그룹은 청산돼 버렸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의 반도체 파운드리 핵심 기업인 SMIC까지 블랙리스트에 포함시키는 등 포위망을 강화하고 있다. 그 덕분에 K반도체는 엄청난 반사이익을 누리며 중국의 추격에서 한숨을 돌리게 됐다.

일부는 중국 반도체 굴기의 몰락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한발 들어가 보면 중국은 여전히 반도체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최고 명문인 칭화대에 반도체 전문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집적회로대학을 세웠다. 상하이 SMEE를 통해 낮은 수준이나마 반도체 장비의 자립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중국은 올해 2분기 한국을 제치고 82억 달러가 넘는 반도체 제조 장비를 사들였다. 전년동기 대비 48%가 늘어났다. 여기에다 지난 10년간 중국은 국내총생산(GDP)의 2.4%를 반도체 연구개발에 쏟아부었다. 칭와유니 등은 청산됐지만 아직 엄청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 판 ‘도광양회(韜光養晦: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힘을 기른다)’라 할 수 있다.

바이든의 반도체 패권 전략

미국은 뒤늦게 국내 반도체 생산기반의 중요성을 깨닫고 제조 역량을 키우는 데 집중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전 세계 반도체 생산능력의 80%를 아시아가 차지하고, 미국은 12%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를 내세워 백악관이 반도체 투자를 압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미 미국은 주요 기업들의 팔을 비틀어 향후 3년간 730억 달러의 대미 투자 약속을 받아냈다. TSMC가 360억 달러, 삼성전자 170억 달러 등이다. 인텔과 구글 등도 200억 달러 투자에 나서고 있다.

반도체는 바이든의 세계 패권 전략의 핵심이다. 향후 경제·기술을 넘어 외교·안보 주도권까지 쥘 수 있는 만능키로 여기는 것이다. 전투력이 인공지능(AI)과 로봇 등에 좌우되면서 반도체의 중요성은 더 커지고 있다. ‘좋은 반도체를 가진 나라가 더 뛰어난 군사력을 갖추게 된다’는 이야기다. 라나 미터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는 “앞으로 미·중 충돌이 군사·외교 등 전방위로 확산되면 반도체가 그 전쟁의 한복판에 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벌써 심상치 않은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미 상무부는 주요 반도체 기업들에 재고 물량과 판매 정보 등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향후 생산 전략과 공장 증설 계획 등 예민한 영업비밀까지 포함돼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그 사정권에 들어 있다. 다만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는 “미국의 국제 전략상 반도체 설계와 비메모리 반도체 등이 핵심이고 메모리 반도체는 중요성이나 민감도가 낮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D램과 플래시 메모리 위주의 중국 현지 공장에 대한 압박도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위협, 미국 반도체 굴기

요즘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전 세계 IT 제품 내부에서 미국 마이크론의 신형 반도체를 찾아내는 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마이크론은 지난 20년간 메모리 시장에서 만년 3위였다. 그러나 최근 최첨단 제품들을 잇따라 들고나와 깜짝 놀라게 했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해 11월 발표한 세계 최초의 176단 낸드플래시 반도체였다. 삼성전자도 싱글 스택으로 128단을 쌓는 수준이다. 지난 6월에는 D램 가운데 회로 선폭이 가장 좁은 10㎚(나노미터)급 4세대(1α) D램의 양산을 공식화했다. 그것도 네덜란드 ASML의 극자외선(EUV) 생산공정이 아닌 기존의 불화아르곤 포토레지스트를 활용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와의 1년 이상 기술격차를 단숨에 압축한 셈이다.

다행히 마이크론이 얼마나 생산 수율을 맞추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세계 반도체 전문지인 가트너나 IC인사이츠 등에는 아직 마이크론의 신제품이 시장에 대량으로 공급되고 있다는 정보가 나오지 않고 있다. 마이크론의 176단 낸드 플래시도 공개된 지 8개월이 지났지만 일부 모바일 제품에만 소량 공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그나마 가슴을 쓸어내리는 대목이다.

미·일 반도체 협정의 악몽

문제는 미국 반도체 굴기가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텔·애플·구글·테슬라 등 미국 거대 기업들이 자체적인 반도체 칩 개발에 나섰다. 특히 인텔의 애리조나주 파운드리 공장은 태풍의 눈이다. 여기에다 세계 반도체 장비 시장에서 미국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스가 점유율 17.7%로 1위다. 이어 네덜란드의 ASML(16.7%)-미국의 램리서치(12.9%)-일본의 도쿄일렉트론(12.3%) 순이다. 앞으로 미국이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면 반도체 설계에서 장비와 제조까지 자국 영토 내에서 모두 완성되게 된다.

이런 미국의 굴기에 K 반도체 업계가 반발하기는 어렵다.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의 악몽 때문이다. 당시 미 정부는 일본 반도체가 기술 패권에 도전하자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미국은 미·일 반도체협정을 맺어 1990년대 초 일본 내 미국산 반도체의 시장점유율이 20%에 이를 때까지 거칠게 압박했다. 이로 인해 일본의 NEC·도시바·히타치 등은 반도체 주도권을 급속히 상실했다. 그 빈 공간을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업체들이 치고 들어가 새로운 플레이어로 부상했다.

K반도체의 수성과 반격

새로운 환경에 맞서 K반도체도 반격에 나서고 있다. 무엇보다 14나노 이하 D램과 200단 이상의 낸드플래시 등 기존 핵심 분야의 기술 투자에 집중하고 있다. 초격차를 유지하기 위한 수성 전략이다. 이와 함께 삼성전자는 인공지능과 자율주행 차의 핵심인 주문형 반도체에서 대만의 TSMC를 따라잡기 위한 공격 속도를 높이고 있다. 특히 공을 들이는 분야는 전공정과 후공정이다. 대만의 최대 강점은 세계 2위 후공정 업체인 ASE 등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2016년 TSMC는 첨단 후공정인 팬 아웃 패키징 기술을 앞세워 애플의 아이폰 AP 위탁 생산을 삼성전자에서 빼앗아갔다.

삼성전자의 반격도 서서히 결실을 거두어 가는 분위기다. 테슬라가 차세대 자율주행 자동차용 HW4.0 칩의 위탁생산을 삼성전자에 맡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만 TSMC와의 경쟁에서 유리한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는 후공정은 물론 ‘커스텀 SOC 사업’ 조직을 통해 반도체 설계 노하우를 전수하는 등  테슬라의 HW4.0 칩 개발을 위한 전공정에도 각별히 신경썼다고 한다. 만약 삼성전자가 테슬라 칩 수주에 성공할 경우 주문형 반도체 시장 점유율에서 마의 ‘20% 벽’을 넘어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