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스탈린과 김일성, 미국의 6·25 참전 예상 못한 이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역사는 예측할 수 있나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역설의 역설이 불러온 오판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은 필연적인 과정처럼 보였다. 1949년에 있었던 소련의 핵 개발과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이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 자신감을 주었고, 그 결과 남침을 감행한 것이라는 스토리는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 밝혀진 많은 사실로 인해 이 과정에서 많은 우연과 역설이 숨어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

1949년을 관통한 공산주의자들의 공세 때문에 미국 정부에서는 1950년 초 국가안보회의 문서 68을 새로 입안했다. 이 문서는 소련이 핵 개발에 성공했기 때문에 미국이 국방비를 더 확대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고, 미국이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더 이상 물러서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전략을 뒷받침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49년까지 방어선에서 한국 뺀 미국, 공산권 득세에 방향 선회
5·16 때 김종필 제거하려던 미국, 박정희 군사체제 더욱 강해져
역사란 무엇인가? 필연을 가장한 우연인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인가
내년 대통령선거·지방선거에서도 의도하지 않은 결과 나타날 수도

1949년까지 미국의 전략은 전 세계를 모두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몇몇 지역만 잘 지키면 된다는 거점 전략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세계 최강의 미국도 자신들이 가진 힘의 한계로 인해 현실적인 선택을 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영국과 독일, 그리고 일본 등 세계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지역만이 포함됐다. 미국의 방어선으로부터 한반도와 대만을 제외했던 애치슨 라인은 이러한 미국의 기존 전략을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1949년의 공산주의자들의 공세로 인해 전략적 변화를 선택한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미국의 전략 변화를 읽지 못했다. 그 결과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김일성은 자신들이 전쟁을 시작해도 미국은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몇 달 후 한국전쟁이 시작됐다. 그들이 갖고 있었던 자신감이 오히려 미국의 전략을 바꾸었고, 궁극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의 계획과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공산주의의 기승은 역설적으로 미국 전술의 강화를 가져왔고, 이는 공산주의자들의 궁극적 실패를 가져왔다. 그렇다면 전략이 바뀌기 전인 1949년 전쟁이 발발했다면, 미국이 개입했을까.

실패로 끝난 김종필 제거 계획

1961년 5·16 쿠데타가 발발하자 미국 케네디 정부는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박정희와 김종필은 누구인가. 미국은 1950년대 말부터 한국에서 정권교체 가능성, 또는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우선 이승만 대통령이 너무나 고령이었다. 게다가 1958년 말 국가보안법 통과(2·4파동), 1959년 조봉암 처형과 경향신문 폐간 등 정치적인 무리수를 두고 있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정권이 교체됐지만, 한국의 상황은 계속 불안했다. 새로운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한반도는 1959년의 쿠바보다 더 위험할 수 있었다. 한국 옆에는 중국이 있었고, 북쪽에는 북한이 존재하고 있었다. 군인을 포함한 새로운 세력이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미 1950년대 중남미와 이란에서 쿠데타에 개입한 경험이 있었다.

이 상황에서 쿠데타가 발발했다. 그런데 미국이 생각했던 새로운 정치세력의 리스트 안에는 박정희도, 김종필도 없었다. 게다가 쿠데타 세력은 과거에 공산주의자들과 연결됐던 경험도 있었다. 군사정부가 실시한 통화개혁과 경제개발 계획은 공산주의의 정책과 유사해 보였다. 새로 조직된 민주공화당은 공산당 조직과 유사했다. 그리고 4대 의혹사건이 발생했다.

군사정부는 주한 미국 기관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군인들에 대한 숙청에 나섰다. 알래스카 토벌작전으로 불린 숙청 작업을 통해 박정희와 김종필이 권력의 중심에 확고히 자리 잡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미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거 주한 미국대사가 지지했던 박정희를 그대로 두되 김종필을 낙마시키고자 했다. 당시 여러 문서를 보면 모든 사회주의 정책과 부정부패는 김종필 주도로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5·16의 기획자였다. 그 결과 김종필이 외유를 떠나는 것으로 박정희와 주한 미국대사가 타협했다. 김종필의 외유 중에 민정 이양이 진행됐고, 경제개발 계획은 수정됐다. 그러나 군사정부의 숙청 작업은 그대로 진행됐고, 김종필이 돌아왔을 때 그의 민주공화당 내 주도권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성공한 두 번째 작전, 그러나 …

이 순간 결정적 사건이 발생했다. 6·3사태였다. 미국이 원했던 한·일관계 정상화 협상 과정에서 배상금을 비밀리에 협상했던 김종필의 메모가 공개된 것이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했다. 미국은 제2의 4·19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시점에서 두 번째 김종필 제거 작전이 시작됐다.

워싱턴은 당황했다. 미국이 원하는 한·일협정을 주도하는 김종필을 제거한다면, 협정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워싱턴에서는 주한 미국대사에게 혹시 김종필과 개인적 원한이 있는 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사태는 결국 김종필의 2차 외유로 마무리됐다. 두 번째 외유를 다녀온 김종필 앞에는 민주공화당 내 반(反) 김종필 인사들이 버티고 있었다. 결국 1969년 3선 개헌을 통해 김종필은 2인자의 자리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미국의 작전은 성공했다.

문제는 김종필의 2선 후퇴로 더 이상 박정희를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김종필을 제거함으로써 박정희 정부가 좌회전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그 결과는 좌회전, 우회전뿐만 아니라 유턴을 하더라도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게 되었다.

그 사이 또 하나의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가 나타났다. 1970년대 초 닉슨 행정부는 데탕트를 통해 아시아에서 냉전에 드는 비용을 아끼려고 했다. 이를 위해 닉슨은 베이징을 방문했고, 남·북한 간의 적십자 대화를 환영했으며, 주한미군 1개 사단을 감축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1971년의 비상사태 선포와 1972년의 유신체제로 화답했다. 미국의 데탕트가 한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불완전한 인간, 흥미로운 역사

주한 미국대사는 답답했다. 그는 한·미관계 사이에 단 하루도 평온한 날이 없었다는 서한을 국무부 장관에게 보내기도 했다. 미국 내에서 반전운동과 인권운동이 강화되고 있는데. 한국에서 강력한 권위주의 체제의 등장이 미국 정부에 반가울 리 없었다.

그러나 김종필 제거는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는 1970년대 내내 한·미 간 불편한 갈등의 근본적 원인이 됐다.

역사적 결과물은 모두 필연적인 과정을 거쳐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특정한 사건이 발생한 원인을 밝히는 과정이 필연적 과정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역사가 그렇게 필연적으로 진행된다면,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심지어 자신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기에 인간이 만들어가는 역사 역시 예측하기 어렵다. 그만큼 역사 속에서는 수많은 역설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래서 역사가 흥미롭고 미래가 궁금한 것 아니겠는가. 내년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는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까. 지금부터 많은 우연과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