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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9월 수상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장원〉

아버지
-오은기

‘조금만 더 기다려 줍서’
‘샛년 지금 감수다’
돈내코 굽이굽이 돌아드는 물결처럼
화급한 나의 마음을 신호등이 막아선다

왜 이러나,
두 달 전 쯤 간 장마가 왜 또 이러나
일본 중국 거덜 냈으니 다시 우리 차례라고
온종일 가을배추가 잠기도록 비가 온다

저녁 일곱 시 쯤 느닷없는 어머니 전화
세상에 눈 감는 일
‘조금만 더 기다려 줍서’
오늘이 생신이신데 뭐가 그리 급하신지요?

◆오은기

장원 오은기

장원 오은기

제주 서귀포시 효돈동 출생. 정드리 문학회 회원.

〈차상〉

갈   
-한영권

가을은 목이 타는
금불초로 왔다가

가슴에
불 질러놓고
아우라지구절초로

구절초
마디마디마다
구구절절 사연 남기고

〈차하〉

AI 문맹
-오대환

손톱만한 칩 속에 태산을 넣고 남는
가상우주 새 지평이 자고나면 열리고
피조물 명령에 따라
인간들이 움직인다

空想이 假想으로 실현되는 AI시대
공부는 하지 않고 세월로 먹은 나이
섣불리 나섰다가는
AI문명 청맹과니

이달의 심사평

시조는 형식 자체가 하나의 우주율이라고 했다. 모호한 듯 선명한, 겉말은 쉽고 속뜻은 어려운, 할 말이 많아서 짧은, 누구나 알지만 아무나 쓸 수 없다고 했다. 덧붙여서 시조는 형식 안의 자유를 추구한다.

이달의 장원으로 오은기의 ‘아버지’를 올린다. 시는 어렵지 않고 재미있어야 한다. 정작 속뜻은 어렵다. 추상과 관념을 걷어낸 사상을 구체적으로 이미지화 했다. “왜 이러나”로 시작하는 둘째수는 “가을배추”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한 죽음에 임박한 아버지의 대비가 선명하다. 특히 종장은 언듯 평이한 언술 같지만 생명에 대한 외경감이 아리도록 스며있다. 차상으로 한영권의 ‘갈’을 선했다. 말에는 우리가 담아낼 수 없는 색깔과 향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가슴에 불 질러놓”는 “아우라지구절초”다. 정선아우라지는 까닭도 많은데 같은 이름을 포착해 외연을 변용한 솜씨가 맵다. 차하로 오대환의 ‘AI문맹’를 택했다. 서정 일변도에서 단조롭지만 주지적 과학적인 소재에 시대적 역설을 담고 있다. 오늘의 첨단 문명이 내일엔 느닷없는 문맹이 된다. 어제의 가상이 오늘의 현상으로 실현되기 때문이다. 김현장·남궁증·김은희 제씨들의 안타까운 분루 속에 더 크고 끝없는 분투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최영효(대표집필)·김삼환 시조시인

〈초대시조〉

푸른 고백
-전연희

내 속에 가두어진 섬이 하나 있습니다
밀물이면 남실남실 꽃그늘에 흔들리고
썰물엔 달랑게 혼자 모랫벌을 움킵니다

지나버린 일이 모두 떠난 것이 아니던 게
울컥울컥 살아오는 보름날 눈뜬 밤엔
뒤채는 물결 달래어 동백꽃이 붉습니다

섬 하나 품고 사는 설레는 마음 동안
가문 땅 어디라도 짙어 오는 초록 천지
툭 건져 나누고 싶은 자라는 섬 있습니다

◆전연희

전연희

전연희

1988년《시조문학》천료. 시조집 『귀엣말 그대 둘레에』 『얼음꽃』 『이름을 부르면』. 현대시조 100인선 『푸른 고백』. 한국시조시인협회상 본상, 이호우·이영도 시조문학상 수상.

사람들은 모두 하나씩의 섬일지도 모른다. 세상이라는 바다 위에 던져진 고립된 존재. 섬, 그는 다가가면 그만큼 멀어지다가, 이만치 달아나고 보면 어느새 곁에 와서 부침한다. 닿을 수 없고 떠날 수 없는 섬과의 관계는 숙명적 동행이면서 자아가 진정한 자기를 찾아 개별화를 실현하는, 끝내는 닿고 싶은 어떤 궁극일 것이다. 아니면 딱딱하게 굳은 노스탤지어이거나 쓸쓸한 연민 덩어리일지도. 그와 나, 나와 그는 끊임없이 서로를 갈망하거나 서로에게서 도망치려 한다. 어쩌면 섬은 캄캄한 무의식의 바다를 떠도는 무섭도록 고독한 ‘나’의 메타포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얼핏 이 시조는 ‘섬’이라는 구체화된 시적 대상에 대한 서정성 짙은 따스한 정경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은 “내 속에 가두어진 섬이 하나 있습니다”라는 첫 구절을 통해 시적 화자로 하여금 처음부터 섬과 나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 관계임을 단호하게 고백한다. 이는 곧 이 시조의 가벼운 서정성을 거부하는 단서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밀물이면 남실남실 꽃그늘에 흔들리고/썰물엔 달랑게 혼자 모랫벌을 움”키는 행위는 바로 화자 자신에게 내재된 절대고독의 또 다른 변주이자 내적 고투의 아픈 무늬인 것이다.

이제 화자는 섬을 더 이상 내 속에 어쩔 수 없이 가두어진 절망의 대상으로 두지 않는다. “지나버린 일이 모두 떠난 것이 아니”라며 따뜻한 화해의 언어로 “가문 땅 어디라도 짙어 오는 초록 천지”라는 긍정의 품을 연다. 섬과 나, 나와 섬의 관계는 그것이 갈망이든 원망이든 운명적 동행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망망한 바다 위에서의 운명적인 길항과 동행을 거듭하는, 섬은 내 안의 또 다른 ‘나’라는 푸른 고백을 통해 존재의 쓸쓸함을 위로 받는다.

서숙희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e메일(choi.jeongeun@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응모편수 제한 없습니다. 02-751-5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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