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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기증품 ‘석보상절’ 최초 공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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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세종의 부인 소헌왕후 심씨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양녕대군이 폐세자되고, 남편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기대하지도 않던 궁의 주인이 됐지만, 왕비가 되자마자 시아버지 태종에 의해 집안이 도륙 나는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공신 집안 출신으로 영의정이던 아버지 심온은 사약을 마셨고, 어머니 안씨는 관비로 전락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생전에 자녀 중 세 명(광평·평원대군, 정소공주)이 눈을 감는 것도 봐야 했다.

그래서였을까. 소헌왕후는 불심이 매우 깊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친정에 대한 보복은 일절 언급하지 않고, 주변을 잘 보살펴 조선의 모범적 왕후로 꼽힌다.

고 이건희 회장 유족이 기증한 『석보상절釋譜詳節』 초간본.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고 이건희 회장 유족이 기증한 『석보상절釋譜詳節』 초간본.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어린 조카를 쫓아낼 정도로 야심과 권력욕이 가득했던 수양대군도 모친 소헌왕후에 대한 효심만큼은 매우 두터웠다. 피접(避接)을 위해 궁밖에 나왔던 소헌왕후가 숨을 거둔 곳도 수양대군의 집이었다. 모친의 사망에 큰 충격을 받은 수양대군은 불심 깊었던 어머니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설법을 묶어 한글로 편찬했다. 이것이 지금 전해지는 『석보상절(釋譜詳節)』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글날을 앞두고 고 이건희 삼성 회장 유족이 기증한  『석보상절』 초간본 2권을 30일부터 최초로 공개한다고 29일 밝혔다.

원래는 총 24권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일부만 남아있다. 이번에 공개되는 권 20과 21은 세종 대에 한글 활자로 찍은 초간본이다. 보물로 지정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권 6·9·13·19),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본(권 23·24)과 같은 판본이다. 『석보상절』은 한글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15세기의 한글과 한자 발음 등을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국립중앙박물관 측은 “『석보상절』은 그동안 연구자들 사이에서만 알려져 있었다”며 “실제로 관람하면서 기증의 의미를 되새기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갑인자(甲寅字)로 추정되는 금속활자 152점도 함께 전시한다. 갑인자는 1434년(세종 16년)에 만들어진 금속활자로 조선시대 세 번째 금속활자다. 이번에 전시되는 활자들은 일제강점기 때 부터 전해온 것으로, 글자체가 조선 전기로만 추정되어 왔다.

그런데 최근 이건희 회장 유족의 기증품 중 갑인자로 인쇄한 『근사록(近思錄)』과 비교하면서 글자체가 서로 유사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 해당 활자 가운데 33점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1455년 만든 금속활자인 을해자(乙亥字)와 성분이 유사한 것으로 나타나 15세기에 주조한 금속활자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중앙박물관은 결론 내렸다. 올해 6월 서울 공평동에서 대규모로 출토된 금속활자와도 크기와 형태가 비슷하다. 이 활자 역시 갑인자로 추정되어 왔다. 세종 때 갑인자를 만드는데 참여했던 김빈은 “참으로 우리 조선의 보물이다”라고 자부했다. 갑인자는 『자치통감』, 『석보상절』 등 많은 책에 이용됐다.

이번 전시는 30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1층 중근세관 조선1실에서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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