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토론은 표현의 자유"…이재명 운명 바꾼 권순일의 설득

중앙일보

입력 2021.09.29 17:01

업데이트 2021.09.29 17:32

권순일 전 대법관 뉴스1

권순일 전 대법관 뉴스1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을 받는 ‘화천대유’ 고문으로 재직한 권순일(62·사법연수원 14기) 전 대법관은 지난해 7월 이재명 경기지사의 대법원 상고심에서 “선거토론에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논리로 항소심 유죄를 뒤집고 무죄를 이끈 것으로 파악됐다. 이 지사 공직선거법 허위사실공표 혐의 대법관 전원합의체 심리 과정에서 “선거 TV토론 과정에서 후보자 발언은 유·무죄로 다툴 일이 아니라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살필 문제”라며 다른 대법관들을 설득했다는 것이다.

이에 1심 무죄→2심 벌금 300만원이라는 당선무효 및 피선거권 박탈형을 선고 받았던 이 지사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7대 5로 무죄 취지 파기환송 결론을 내리면서 기사회생했다.

이 지사 사건 배당 8개월만 대법원 소부→전원합의체로

29일 중앙일보 취재에 따르면 권 전 대법관이 처음부터 이 지사 사건을 맡은 건 아니었다. 2019년 10월 대법원 2부(주심 노정희 대법관)에 배당된 이 지사 사건은 8개월째 결론이 나지 않다가 지난해 6월 돌연 법원행정처장을 제외한 대법관 13명이 참여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됐다. 김선수 대법관이 변호사 시절 이 지사의 다른 사건 변호를 한 적이 있어 이 사건을 회피하면서 결국 대법관 12명이 전합 심리에 참여하게 됐다.

당시 법조계에서는 대법원 2부를 구성하는 노정희, 김상환, 박상옥, 안철상 대법관의 유·무죄 의견이 갈리면서 전합에 회부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그해 7월 선고된 전합 결과도 나뉘었다. 노 대법관과 김 대법관이 무죄 의견을 내 다수의견에, 박 대법관과 안 대법관은 유죄 의견으로 소수의견에 섰다.

권 전 대법관 전합 심리 “선거토론의 표현의 자유” 의견 제시

권 전 대법관이 이 지사 상고심에 참여하게 된 건 전합 심리때부터다. 사건의 쟁점은 이 지사가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열린 TV토론회에서 친형을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려 한 적이 없느냐고 묻는 상대 후보의 질문에 이 지사가 “그런 일 없습니다”라고 답한 것이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공표죄에 해당하는지였다.

권 전 대법관은 당시 이 지사 사건에 대해 유ㆍ무죄를 다툴일이 아니라 헌법상 표현의 자유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는 취지의 의견을 냈다고 한다. 국민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의혹에 대해 TV토론 과정에서 부인한 것을 허위사실 공표로 볼 것인지, 본인을 비방하는 상대 후보자에 대한 방어로 볼 것인지는 유권자 개개인이 판단할 문제라는 것이다. 선거 TV토론회에서의 발언을 사법부에서 하나하나 문제 삼는다면 선거가 결국 유권자의 선택이 아닌 검사·판사가 뽑는 게 될 것이라는 취지의 주장도 했다고 한다.

이 지사 판결문에 등장한 ‘숨 쉴 공간’이라는 법리에 대한 논의도 대법관 심리 과정에서도 나왔다고 한다. ‘숨 쉴 공간’은 표현의 자유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중립적인 공간이 필요하다는 법리다. 2018년 김재형 대법관이 주심을 맡은 명예훼손 사건에서 나왔던 표현인데 이 지사 사건에서도 이 논리가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지가 전합에서 쟁점이 됐다. 논의 후 ‘숨 쉴 공간’은 “선거의 공정을 위해 부정확하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표현들 모두에 대해 무거운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논리로 이 지사 판결문에 반영됐다.

이 지사 발언의 허위사실 여부→표현의 자유로 쟁점 전환

이 지사의 발언이 ‘허위사실인지 여부’에 맞춰졌던 전합 논의 초반의 쟁점은 권 전 대법관의 주장이 다른 대법관들의 공감을 얻으며 ‘표현의 자유’ 쪽으로 쟁점이 옮겨갔다고 한다. 최종 판결에는 권 전 대법관이 제시한 의견이 다수의견의 근거로 대거 포함됐다. ▶후보자 토론회의 발언을 문제 삼아 수사권 개입이 초래된다면 선거 결과가 최종적으로 검찰과 법원의 사법적 판단에 좌우될 위험에 처한다 ▶후보자 토론회에서 나온 질문·답변이나 주장·반박 등은 일방적이거나 적극적으로 허위 사실을 표명한 것이 아닌 한 허위사실 공표로 처벌할 수 없다는 등의 의견으로 이 지사 무죄 판결의 핵심 근거가 됐다.

대법원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통상 전합에서 대법관들이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다 최종 표결하는 경우가 많은데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경우 합의를 거치며 다른 대법관들의 생각이 변하거나 의견이 합치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근래에 임명된 순으로 최종 표결에 참여하는 관례에 따라 심리에 참여한 12명의 대법관 중 선임대법관이었던 권 전 대법관이 11번째로 표결에 참여했다. 앞선 10명의 대법관은 5대5로 유·무죄 의견이 정확히 반반으로 나뉜 상황이었고, 권 전 대법관이 무죄 의견에 서면서 무죄가 다수가 됐다. 이후 김명수 대법원장이 다수의견을 따르며 7대5 무죄 취지 파기환송 결론이 나왔다.

권 전 대법관은 판결 이후 “이 지사 무죄 판결의 캐스팅보트 역할을 한 것 아니냐”는 중앙일보를 비롯한 다수 언론의 질의에 “사실과 다르다”는 취지로 해명했다. 당시 권 전 대법관은 “당초 내가 준비한 의견은 소수의견이었는데, 다수의견에서 이를 인용하고자 했고, 결론이 비슷한 것 같아 소수의견을 고집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지난해 9월 퇴임한 권 전 대법관은 지난해 11월부터 화천대유에서 고문으로 재직하며 월 1500만원가량의 고문료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변호사단체와 장기표 전 국민의힘 경선 후보 등은 권 전 대법관을 사후수뢰 혐의로 고발했다. 이들은 "권 전 대법관은 이 지사 사건 무죄 판결에 앞장선 뒤 이 지사와의 연관 의혹이 불거진 화천대유에 고문으로 취업해 거액의 고문료를 받았다"며 "무죄 판결의 대가"라며 재판 거래 의혹을 제기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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