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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범 유죄 선고 '부메랑'… 살해 위협 떠는 아프간 女판사들

중앙일보

입력

아프가니스탄 전직 여성 판사들이 살해 위협에 떨고 있다. 자신들이 유죄 선고를 내렸던 죄수들이 탈레반 치하에 석방되면서다. 풀려난 죄수들의 보복 협박에 판사들은 집을 떠나 도피생활을 하고 있다. 30년 경력의 한 판사는 “조국을 위해 봉사하고 싶어 판사가 됐는데, 나는 지금 죄수 취급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한 아프가니스탄 여성이 7일(현지시간) 카불에서 열린 반파키스탄 시위에 참석해 구호를 외치고 있다. [EPA=연합뉴스]

한 아프가니스탄 여성이 7일(현지시간) 카불에서 열린 반파키스탄 시위에 참석해 구호를 외치고 있다. [EPA=연합뉴스]

28일(현지시간) 영국 BBC가 전한 아프간 여성 판사들의 실상이다. 탈레반 집권 후 은신처로 몸을 숨긴 여성 판사는 최소 220명. BBC는 그중 6명의 이야기를 전했다. 다만 이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신원은 공개하지 않았다.

“반드시 복수한다”던 죄수, 석방 후 사무실 찾아와

휴먼라이츠워치에 따르면 아프간에서 가정폭력을 경험한 여성과 여자아이는 87%에 달한다. 남편의 매질로 부인이 목숨을 잃는 사건도 비일비재하다. 여성폭력금지법을 시행하고 있지만, 남성 중심의 사법 체계에서 여성 인권은 관심 밖이다.

이런 아프간에서 여성 판사들은 ‘여성 인권의 수호자’로 통했다. 지난 20년 간 판사로 재직한 여성 270여 명은 강간·폭력·살인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 사건의 유죄 판결을 주도하며 여성의 법적 보호에 앞장섰다.

마수마(가명)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지난달에도 아내를 때려 숨지게 한 남성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젊은 여성의 처참한 모습이 떠오르는 극악무도한 사건이었다. 마수마는 이 남성에게 20년 형을 선고하고, 가정폭력이 중범죄라는 점을 각인시켰다. 그러나 남성은 오히려 마수마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반드시 너를 찾아내 복수하겠다”.

그때 흘려들었던 이 말이 현실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탈레반 집권과 함께 돌아온 죄수들은 휴대전화와 문자·음성 메시지로 마수마를 협박했다. 공포에 떨던 마수마는 결국 옷만 챙겨 한밤중에 도망쳤다. 그러나 급하게 떠나면서 미처 지우지 못한 개인정보가 죄수들의 손에 넘어가면서 여전히 추적당하고 있다.

지난 2월 아프가니스탄 남부의 한 TV 여성 진행자가 모습을 감추고 AP통신과 인터뷰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2월 아프가니스탄 남부의 한 TV 여성 진행자가 모습을 감추고 AP통신과 인터뷰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더욱 우려스러운 건 이웃과 남겨진 가족을 향한 보복이다. 그간 탈레반과 이슬람국가(IS) 요원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사나(가명)가 그랬다. 사나는 죄수들에게 하루에 20통이 넘는 협박 전화를 받았다.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우선 몸을 피했다. 그러자 죄수들은 남겨진 가족을 표적으로 삼았다. 매일 집으로 찾아가 사나의 행방을 묻고, “모른다”고 답하면 총구를 겨누고 구타를 일삼았다고 한다. 사나는 친척들이 다칠까 봐 더는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고 했다.

탈레반, 여성 판사 250명 해고…“죄수 협박은 우리와 무관”

여성들의 인권을 보장하겠다던 탈레반의 반응은 어떨까. BBC에 따르면 탈레반 대변인 빌랄 카미리는 여성 판사를 향한 위협과 관련해 “그 누구도 여성 판사를 위협해서는 안 되며 아프간에서 두려움 없이 지내야 한다”고 답했다. 그는 여성 판사들을 겨냥한 보복성 협박 사건을 조사하고, 엄중히 조치하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말 뿐인 약속이었다. 지난 20일 탈레반은 이전 정부 아래서 일했던 여성 판사 250여 명을 해고하고, 자신들이 지명한 자들로 교체했다. 전직 여성 판사들은 탈레반이 집권 전부터 공격을 일삼았다고 말한다. 지난 1월 카불에서 여성 대법관 2명이 피살된 데 이어 하루 만에 법원을 겨냥해 발생한 폭탄 테러를 대표 사례로 꼽는다. 탈레반은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여성 판사들을 향한 탈레반의 공격은 예견된 일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1월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발생한 자동차 폭발 현장. 이 사건은 수도 카불에서 여성 대법원 판사 2명이 피살된 지 하루 만에 발생해 법원을 겨냥한 공격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EPA=연합뉴스]

지난 1월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발생한 자동차 폭발 현장. 이 사건은 수도 카불에서 여성 대법원 판사 2명이 피살된 지 하루 만에 발생해 법원을 겨냥한 공격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EPA=연합뉴스]

이런 상황에 현재로서 아프간 여성 판사들의 탈출구는 없다고 BBC는 전했다. 자금 부족은 물론이고, 여권 등 출국을 위한 서류를 챙길 여건이 안되기 때문이다. 영국과 뉴질랜드 등 일부 국가에서 이들의 탈출을 돕겠다고 밝혔지만, 언제, 어떤 방식으로 아프간을 떠날 수 있을지 구체적인 계획은 불투명하다.

마수마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교육을 받아서? 여성을 도와서? 범죄자를 처벌해서?”라고 토로했다. 이어 “나는 조국을 사랑한다. 그런데 지금 나는 죄수다. 내 아들에게 우리가 숨어지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며 서방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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