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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같이 살자’거부한 총각 보란 듯이 불 속에 뛰어든 여인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옛이야기(69)

지난번 글에서 고생이 뭔지 알고 싶어 나섰다가 밤새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린 총각 이야기를 했었다. 하룻밤 묵어가자고 들렀던 집에는 한 부인이 오늘 돌아가신 시어머니 송장과 함께 있었고, 이 부인은 약 구하러 나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으러 가야겠다며 총각에게 “송장을 지키고 있을래? 나랑 함께 나갈래?” 하고 물었다. 호랑이가 남편을 잡아먹은 것을 보고는 뒷수습을 해야겠다며 총각에게 “여기서 호랑이를 지키고 있을래? 연장 가지러 다녀올래?” 하고 물었다. 총각이 연장을 가져오자 “횃불 들고 호랑이를 쫓을래? 남편 송장을 짊어질래?” 하고 물었다.

결국 하룻밤 새 생전 모르던 두 사람의 송장을 처리해야 했던 총각은 날이 밝자마자 집으로 돌아갈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그런데 고생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이번엔 부인이 이 산속에서 혼자 살아갈 일이 막막하다며 총각을 따라나서겠다고 한다. 또다시 맞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총각의 머릿속엔 ‘이렇게 독한 여자와는 살 도리가 없어’ 하는 생각뿐이었다. 부인을 뿌리치고 길을 나섰는데, 부인은 자길 보고 가라고 뒤에서 부르더니 집에 불을 지르고 지붕 위에 올라가 “나 죽는다” 하며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과연 독한 여자이긴 했다.

총각은 어딜 봐도 좀 덜떨어진 사람인데, 부인은 당차게 일 처리를 다 해 놓고 이 총각을 따라나서겠다고 했다. [사진 pxhere]

총각은 어딜 봐도 좀 덜떨어진 사람인데, 부인은 당차게 일 처리를 다 해 놓고 이 총각을 따라나서겠다고 했다. [사진 pxhere]

총각이 고생이 뭔지 궁금하다며 집을 나섰을 땐 나름 진취적이고 용감한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사람이 고비마다 선택한 것은 조금이라도 덜 무섭거나 덜 힘든 쪽이었고 사실상 문제 해결은 부인이 다 한 셈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 나서고, 호랑이가 잡아먹고 있는 걸 보고 쫓아내고, 집 안에서 돌아다니고 있던 시어머니 송장도 호통을 쳐서 잠재웠다. 그러니까, 부인은 과연 독한 사람이었고 총각은 어딜 봐도 좀 덜떨어진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이 부인은 그렇게 당차게 일 처리를 다 해 놓고도 왜 막판엔 이 총각을 따라나서겠다고 한 것일까?

홀로 남게 된 여인이 자기 집에 스스로 불을 지르고 지붕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이 똑같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또 한 편 있다. 임진왜란 때 탄금대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신립 장군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2019년 12월 13일 자 ‘구비구비옛이야기(48)에서 다룬 바 있다)

신립이 사냥하러 다니다가 한 산속 집에서 하루 묵게 되었는데 그 집엔 처녀가 혼자 있었다. 사연을 들으니, 그 집 종이었던 놈이 앙심을 품고 집안의 사람들을 하나씩 잡아 죽이는 바람에 온 가족이 몰살당하고 이제 자기 하나 남았는데, 오늘이 자기가 갈 차례가 되는 날이라는 것이었다. 신립은 걱정하지 말라며 큰소리치고는 활을 갖고 몰래 숨어 있다가 한밤중에 그 종놈이 나타났을 때 단번에 해치웠다. 다음 날 아침 의기양양하게 떠나려는 신립에게 처녀가 매달리며 애원하였다. “제발 저를 종이라도 좋고 후실이라도 좋으니 여기 혼자 두지 말고 데리고 가 주세요.”

앞의 총각과 비슷한 상황이다. 하룻밤 묵기를 청한 혈기왕성한 청년이 있고, 산속 큰 집을 홀로 지키고 있는 여인이 있다. 그 집안엔 무언가 우환이 있었고, 이 청년이 때맞춰 등장해 준 덕분에 어쨌든 문제를 해결했다. 다만 고생을 경험하고 싶었던 총각과 신립 사이에는 능력치에 차이가 있다는 게 좀 다르다면 다르겠다. 처녀가 제발 자길 후실로라도 데리고 가 달라고 했을 때 신립이 던진 대사는 이렇다. “난 이미 처자가 있는 몸이오. 또한 나라에서 큰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처녀가 내미는 손을 뿌리치고 집을 나섰더니 좀 있다가 “이보시오. 여기 좀 보고 가시오” 하는 소리가 들렸고, 신립이 뒤를 돌아다보니 처녀가 집에 불을 지른 채 지붕에서 떨어져 죽었다.

나중에 신립은 장군이 되어 임진왜란에 참전하였는데, 천혜의 요새인 조령을 버리고 탄금대에 진을 치고 있다가 크게 패했다. 탄금대의 지형을 이용해 배수진을 치고 최후의 일전을 치르고자 했던 것이나, 8000명의 군사 중 두서너 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할 만큼 큰 패전의 기록을 남겼을 뿐이다. 워낙 희생이 컸던 싸움이었기에 조령을 두고도 굳이 탄금대에 진을 쳤던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었던 민심이 후대에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싶다.

이렇게 보니 완전히 같은 장면이 서로 다른 이야기에 등장한 셈인데, 그나마 고생이 궁금했던 총각은 머리가 세어 버리는 정도로 끝났지만 신립은 전란에 나서서 나라의 명을 걸고 싸워야 했던 장군이었기에 결말의 강도가 좀 더 세다. 신립은 탄금대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 최후를 맞이했다.

이제 우리는 또 궁금증을 갖게 된다. 그 여자들은 왜 거의 처음 본 것이나 다름없는 남자를 따라가려고 했을까? 신립이 도와주었던 처녀는 자신을 종으로 삼아도 좋고 후실로 데려가도 좋으니 제발 이 산속에 홀로 두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앞의 총각은 너무나도 독하게만 느껴졌던 부인과 함께할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았고, 신립은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던데다 장차 나랏일을 할 사람이라는 명분까지 더해져 더욱 처녀의 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신립 장군의 이야기에서는 신립의 장인이 등장하는데, 사냥 나갔다가 며칠 만에 돌아온 신립의 얼굴을 보고 뭔가 일이 있었음을 짐작했다. 그래서 추궁했고 신립이 산속에서 있던 일을 전하자 장인은 곧바로 신립에게 못난 놈이라고 하면서 꾸짖었다. 사람 목숨을 살리는 일이 더 중요한데 그걸 외면했으니 장차 몸조심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반드시 큰일을 치를 것이라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신립의 경우를 보더라도 남자들은 당장 눈앞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하였지만 한 몸을 의탁할 만큼 믿음직스러운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야기 속의 여인들이 산속에 혼자 있게 두지 말아 달라, 내가 따라갈 테니 좀 받아 달라, 애원하는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지난 회차 글을 개인 SNS에 링크하였더니 친구들이 감상을 남겼다. “왜 총각에게 뒤를 돌아보라고 했을까?”, “등장인물 한 명 한 명 입장에서 봐도 다 고달파. 그나마 총각은 살아남기라도 했네요”, “찌질할지라도 함께 부대끼며 살고픈, 옥시토신 뿜뿜을 여성은 꿈꾸죠. 의도적으로 새로운 관계 맺음엔 두려워하고요. 그러한 심리가 담긴 듯해요. 누구를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지만, 그 누구도 곁에 없다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옥시토신(oxytocin) 호르몬은 신뢰, 관계, 사랑의 호르몬이라고 일컬어진다. 낯선 사람도 덜 경계하게 하고 부정적 감정을 줄이는 데에도 관여한다. 그런데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게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어서, 개에게 많이 분비되면 공격적인 성향을 가질 수 있고 사람에게는 나쁘게 반응할 경우 불안감을 증대시키는 요소를 보일 수도 있다고 한다.

옥시토신의 사회적 결속력 증진 효과는 친분이 있는 그룹에 대해 나타나지만, 그렇지 않은 그룹에 대해서는 배타성으로 표출된다. [사진 네이버 지식백과]

옥시토신의 사회적 결속력 증진 효과는 친분이 있는 그룹에 대해 나타나지만, 그렇지 않은 그룹에 대해서는 배타성으로 표출된다. [사진 네이버 지식백과]

이야기 속에서 도움을 받긴 했지만 아직 낯선 남자에게 자기 몸을 의탁하려다 거부당하자 불길 속에 뛰어든 여인들은 그런 면에서 좀 ‘매운’ 여자이겠다. 호랑이가 잡아먹은 남편 시신을 제 손으로 수습하고, 집안을 돌아다니는 송장에 호통을 치고, 온 집안 식구가 다 죽어 나가도록 정신줄 잡고 홀로 잘 버티던 여인들이 끝내 그 집에서 혼자 살지는 못하겠다고 하면서 낯선 남자를 따라나섰다. 그러더니 또 자기를 거부하는 남자들에게 “그냥은 못 간다, 내 꼴 보고 가라” 한다. 그렇게 불길 속에 뛰어드는 여인들의 매운 결기가 새삼스럽다. 호랑이와 송장에도 맞서는 대범함과 곁에 아무도 없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처연함은 한 통속으로 묶이는 성질일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그런 에너지가 부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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