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철호 칼럼

박근혜를 내려놓아야 박근혜가 산다

중앙일보

입력 2021.09.29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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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또다시 박근혜 선거가 되고 있다. ‘화천대유’와 ‘고발사주’가 대선판을 휘젓고 있지만 국민의힘 경선은 ‘박근혜’가 지배하고 있다. 변수를 넘어 상수로 자리 잡았다. 오래전부터 야당 예비후보들 상당수가 온갖 선을 대고 박 전 대통령 구치소 면회에 공을 들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이슈의 정치적 위력을 미리 계산한 것이다. 물론 면회는 모두 물거품이 됐다.

박 전 대통령이 선거에 다시 소환된 것은 추석 직전부터였다. 윤석열·유승민 후보가 구미의 박정희 생가를 찾았을 때 잇따라 봉변을 당한 게 시작이었다. 지지자들은 “죄 없는 대통령을 왜 구속시켰느냐” “배신자가 왜 왔냐”며 거칠게 충돌했다. 급기야 경선 2차 토론회에서 ‘배신자 논쟁’이 불붙었고, 3차 토론회에선 전면전으로 비화했다. 박근혜 카드는 갈수록 위력을 더할 수밖에 없다. 경선 당원 투표 비중이 1차 20%, 2차 30%, 3차 50%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날 가혹하게 수사한 것 용서한다”
“나와 맞선 걸 배신자로 몰지 말라”
박근혜의 용서 메시지가 절실하다
분노가 이성을 삼켜서는 안 된다

2017년 탄핵 때 찬성 비율은 77~78%였다. 지난 8월 광복절 때도 박근혜 사면 반대 여론이 56.8%였다. 하지만 지역마다 정치적 진앙지는 다르다. 대구·경북(TK)에선 탄핵 때도 반대한 20%의 콘크리트 지지층이 핵심이다. 다른 곳에선 박근혜 하면 최순실이 어른거리지만, TK에선 박정희와 육영수부터 떠올린다. 산업화 기적을 일군 부친, 따뜻하고 단아했던 모친의 비극을 잊지 못한다. 아찔했던 커터 칼 테러와 “대전은요?”라던 장면까지 애틋함이 깔려 있다. 근대사를 함께 해온 기억의 원형질이다. 설사 박근혜를 손절해도 박정희·육영수는 결코 손절할 수 없다는 게 TK의 정서다.

야당 후보들은 이런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끊임없이 도발한다. 홍준표 후보는 윤석열 후보를 향해 “보수 진영을 궤멸시켜 벼락출세했고, 5명이나 목숨을 끊었다”고 공격한다. 유승민 후보에겐 ‘배신자 프레임’을 끊임없이 건드린다. 유 후보도 윤 후보를 향해 “어떻게 45년을 구형해 놓고 사면을 이야기하나”며 이중성을 파고든다. 따지고 보면 홍 후보도 자유롭지 못하다. 2017년 3월 편집인협회 초청 세미나에서 “춘향인 줄 알고 뽑았더니 향단이었다”며 “탄핵을 당해도 싸다”고 했다.

문제는 박근혜 선거가 되면 보수진영이 어김없이 패배했다는 점이다. 대선-지방선거-총선 등 모조리 크게 졌다. 오히려 보수 야당은 ‘박근혜 없는 선거’에서 가능성을 발견했다. 지난 4월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가 그랬고, 6월에는 이준석 당대표가 당선됐다. 하지만 불과 석 달 만에 다시 박근혜 선거로 되돌아가고 있다. 경선 토론회가 박근혜를 둘러싼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면서 수도권 중도층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TK가 박근혜를 살리고 집권 가능성을 높이려면 생각을 다시 해야 할 듯싶다.

탄핵 이후 박 전 대통령 메시지는 유영하 변호사를 통해 딱 세 번 나왔다. 첫 메시지는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을 거론하며 “허리가 안 좋아 구치소에 책상과 의자를 넣어주었으면 했는데 반영이 안 됐다”는 서운한 감정이었다. 세 번째는 유 변호사가 총선 공천에서 컷 오프되자 “두 번이나 칼질을 당했다”는 전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이상한 메시지였다. 그나마 2020년 3월 4일 공개된 두 번째 자필 서한이 가장 분명했다. “태극기를 들었던 모두가 하나로 힘을 합쳐주실 것을 호소드린다. 서로 분열하지 말고 역사와 국민 앞에서 하나 된 모습을 보여주시기 바란다.” 총선을 앞두고 ‘통합’을 주문한 절제된 메시지였다.

박 전 대통령은 그 이후 지금까지 1년 반 넘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 국민의힘 후보들이 앞다투어 그를 소환해 TK 구애에 나서는 퇴행적 장면만 연출하고 있다. 수도권 중도층 눈에는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것이다. 보수 야당의 자해행위나 다름없다.

지금 ‘박근혜 없는 선거’의 열쇠는 박 전 대통령이 쥐고 있다. 그동안의 분노를 떠올리면 언제 “정치 수사에 억울하게 희생됐다”거나 “배신자를 표로 응징해 달라”는 감정적 앙금을 터뜨릴지 모른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을 오랫동안 지켜본 인사들이 입을 모으는 대목이 있다. “적어도 인내심과 애국심에 관한 한 넘볼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오랜 인고의 생활 끝에 2007년과 2012년의 대선 출마 때도 “저에겐 부모도, 남편도, 자식도 없습니다. 저에겐 오직 대한민국만 있습니다”고 했다.

이런 인내심과 애국심에 기댄다면 지금 박 전 대통령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용서의 메시지다. 동서고금 인간 사회에는 “네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마라”는 황금률(golden Rule)이 있다. 공자는 이를 “한 마디로 용서의 서(其恕乎)”라고 했다. 어렵더라도 평생 지켜야 할 덕목이라고 했다. “나를 가혹하게 수사한 것을 용서한다” “나에게 정치적으로 맞섰다고 더 이상 배신자로 몰지 말라” “나를 향단이라고 부른 막말까지 용서한다”…. 박 전 대통령이 이런 메시지를 발신한다면 그것이 정치적으로 승리하는 길이요, 역사적으로 부활하는 길이 아닐까 싶다. 더는 분노가 이성을 삼키게 해선 안 된다. 박근혜를 내려놓아야 박근혜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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