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소문 포럼

정치적 거리두기

중앙일보

입력 2021.09.29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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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국제외교안보디렉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힐러리 클린턴이 6년 전 미국 대선 도전을 선언하면서 내건 구호는 ‘보통 미국인의 대변자(champion)’였다. 보통 사람들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취지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올해 1월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강조했던 게 ‘단합 없는 평화는 없다(Without unity there is no peace)’였다.

대변하고 통합하는 것, 즉 누군가를 위해 행동하는 동시에 여러 목소리를 조율해 최대공약수 합의를 도출해 개인과 공동체의 번영과 진보를 이끄는 게 일반적인 대의민주주의의 이상적인 모습이다. 우리도 두 가지 역할을 모두 추구한다. 더불어민주당이 강령에 ‘서민과 중산층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명시했고, 국민의힘도 강령 첫 줄에 ‘모두의 내일을 함께 만들어간다’고 약속했다. 대변하고 통합하는 게 정치다.

정치 본령은 공동체 대변과 통합
지지층만 위로하면 역효과 불러
맹목적 추종 대신 거리두기 필요
민주주의 후퇴 막는 최고의 백신

그런데 한국 정치에선 또 다른 역할이 있다. 정서적으로 ‘힐링’을 해주는 위로자 역할이다. 사실 위로의 정치, 또는 위로의 통치는 항상 있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의 신원(伸寃) 역시 과거의 분한 일을 바로잡고 위로하는 일종의 힐링 통치였다고 볼 수 있다.

정치 분야에서 힐링이 유행어가 된 건 2010년대였다. 당시 콘서트 정치가 한 사례다. 무슨 무슨 콘서트 현장에서 얼굴을 직접 바라보는 대면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정치인과 공감하고 때론 공감 수준을 뛰어넘어 응어리진 마음마저 풀어주는 효과까지 보곤 했다.

정치인과 정당 입장에서 유권자들과 ‘정서적 일체감’을 확보하는 건 엄청난 무기다. 콘크리트 지지층을 만들 수 있어서다. ‘정치인=나’로 인식하는 강력한 동일시 효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깨기 어렵다.

힐러리 클린턴(왼쪽)은 미국 대선에 나서며 ‘보통 미국인의 대변자’를 표방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단합 없는 평화는 없다’를 강조했다. [AP·AFP=연합뉴스]

힐러리 클린턴(왼쪽)은 미국 대선에 나서며 ‘보통 미국인의 대변자’를 표방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단합 없는 평화는 없다’를 강조했다. [AP·AFP=연합뉴스]

하지만 정치인이나 정치 세력에게서 위안을 얻고 평안을 느끼는 이른바 ‘힐링 정치’를 마냥 바람직스럽게만 볼 수는 없다. 특정 정치인 또는 정치 세력과 정서적으로 위로받고 의지하는 관계가 굳어지면서 감정적으로 똘똘 결집하면 집단적으로 동굴의 함정에 갇힐 수 있다는 게 한계다.

내가 보는 세상은 나를 지지하고 열렬하게 응원하는 이들로만 가득 차 있으니 자기 자신을 제삼자 시선에서 바라보는 객관적 관찰자 시점에 설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또 정서적 위안에 주력하면서 이를 지지층을 결집하는 장치로 사용하는 정치가 더는 힐링의 은사를 보여주지 못할 경우 다른 방식으로 해법을 찾기 십상이다.

내가 응어리를 풀어주지 못하는 이유를 경쟁자, 우리 바깥에서 찾는다. 외부에서 분노의 대상을 찾아 책임을 회피하면서 지지층을 결집할 수 있으니 투아쿨파(tua culpa, 네 잘못)로 방향을 틀곤 한다.

특히 힐링이 지지층에게만 해당하는 당파적 위로라면 정치의 또 다른 책무인 공동체의 통합에는 역효과를 낸다. 도널드 트럼프의 리더십이 대표적이다. 월스트리트와 애플로 대표되는 금융과 IT 산업을 선도하는 미국에서 경제적으로 점점 위축되는 1차산업 백인 종사자들과 블루칼라 백인 노동자들에게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위로해준 게 트럼프였다.

하지만 트럼프의 포효는 철저하게 지지층에게만 향했다. 집토끼 정치와 집토끼 선거전에 올인했고, 대선 이후엔 결과에 불복하며 미국을 쪼개놨다. 지난 1월 “의사당으로 가자”는 그의 거리 연설 한마디에 군중은 “트럼프 대장”을 외쳤고 정말로 열성 지지자들이 미 의사당을 습격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을 정도다.

정치는 정치인·정당과 유권자가 정반합으로 계속 영향을 주고받는 변증법적 과정이다. 이런 면에서 한국 정치에서 우리가 구축해야 할 건 맹목적 지지가 아니라 정치적 거리두기다. 민주당 진영을 향해서만 거리두기를 요구해선 설득력이 없고, 여야 지지층 모두에 필요하다. 코로나19로 인한 감염을 줄이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에 나서는 것처럼 무조건적인 추종에 전염되지 않도록 때론 공동체의 시선에서 정치를 바라보는 비판적 지지의 태도다.

정치가 유권자를 무서워하지 않고, 반대로 선동하려 하면 민주주의가 무너진다. 여건 야건 정치인을 상대로 언제라도 경고할 수 있고 때론 외면할 수 있는 유권자 집단이 중심에 서는 게 한국 정치의 후퇴를 막는 백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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