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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원숙연의 퍼스펙티브

부처 칸막이 벗어나 혁신기술·유연한 서비스 접목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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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정부조직개편의 ‘반복된 실패’ 끊으려면

원숙연의 퍼스펙티브

원숙연의 퍼스펙티브

만약 주택부가 생기면 부동산 가격이 잡힐까. 정부 부처와 공무원 수를 줄이면 작고 효율적인 정부는 가능해질까.

최근 정치권과 관가에 회자되는 정부조직개편 논의는 선거의 계절을 알리는 서곡(序曲)같다. 폐지대상으로 지목된 여성가족부와 통일부는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강변하느라 노심초사이고, 다른 부처들 역시 대선 시나리오에 맞춘 조직개편안 마련에 분주하다.

탄핵정국의 소용돌이에서 출범한 문재인 정부를 빼고, 정부수립 이후 지금까지 총 61차례 조직 개편이 이뤄졌다. 선거 때마다 후보 캠프나 정권 인수위원회 테이블 위에서 정부 부처의 명운은 갈렸다. 통·폐합과 이합집산이라는 ‘칼끝에서’ 과학·기술·정보·통신의 네가지 기능이 한 지붕아래 모이기도 했다. 행정자치부-행정안전부-안전행정부-행정자치부-행정안전부처럼 끝없는 ‘변신의 신공’(神工)을 선보이기도 했다.

경계 초월해 발생하는 21세기적인 사악한 문제를
큰정부 - 작은정부의 20세기적 아이디어로 분석하고
칸막이 중심의 관성적 조직개편으로 해결하려는 건
중복 규제만 양산하는 ‘2022년판 바보짓’ 기록될 뿐

사정이 이렇다보니 선거철이 되면 각 부처는 대선 후보들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고 대응책 마련에 부심한다. 관료들을 비난만 할 이유가 없다. 반복된 개편학습에 따른 조건반사일 뿐이다. 만일 5년 전에 통합·신설된 ‘한 지붕 여러 가족’ 부처라면 초기 적응에 1~2년 허비하고, 정권 후반기엔 차기 개편을 겨냥한 권토중래(捲土重來)를 준비할 것이다. 그러니 정책현안에 집중할 시간은 기껏해야 1~2년에 불과하다.

정부 외형만 바꾸는 조직개편, 5년마다 반복

이렇듯 부처의 이름조차 따라가기 힘들게 반복된 조직개편은 성공보다는 실패 쪽에 가깝다. 매번 떼었다 붙였다, 이리 저리 옮기며 외형과 이름은 바뀌었지만 실상은 달라진 것 없는 역설적 상황. 작고 효율적인 정부의 약속이 무색하게 2021년 현재 공무원은 113만 명, 558조원의 정부예산에, 국가채무는 1900조원을 상회한다. 부처 칸막이는 높고 부처 간 관할 다툼은 여전히 강고하다. 그 속에서 부처이기주의는 상수가, 칸막이 행정은 일상이 된다. 모두가 국민이 고스란히 부담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이다. 그런데도 또다시 돌아온 선거의 계절, 백가쟁명식 조직개편안이 분분하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건 바보짓”이라 하지 않았던가. 5년마다 정부조직 외형만 바꾸는 ‘바보짓’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이 반복된 실패의 고리를 이제는 끊어야 한다.

문민정부 이후 정부 조직개편(일부)

문민정부 이후 정부 조직개편(일부)

이를 위해 먼저 대선 후보들은 정부조직의 외형변화를 새 정부 출범의 패키지딜(package deal) 정도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5년 단임의 정치 생태계에서 이전 정부와의 차별성 또는 단절의 징표로 조직개편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환상이다. 더 이상 새롭지도 감동적이지도 않다. 그 약속은 기시감을 넘어 경험칙이 된 지 오래다. 과열일로의 미·중 패권경쟁, 만성적 저성장과 격차심화, 턱 밑까지 차오른 인구재앙, 전염병 공포의 일상화 등 다음 정부를 기다리는 ‘사악한 문제(wicked problem)’는 특정 부처 관할이나 소관업무 중심의 전통적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경계를 넘나들며 협력해도 해결이 어려운 난제가 도사리고 있는데, 부처 칸막이가 그렇게 중요한가. 시대착오적이다.

정부의 일하는 방식 바꿔야

이전 정부와의 진정한 차별성을 원한다면 부처 칸막이 바꾸는 것 말고 정부의 일하는 방식을 어떻게 F.A.S.T.로 바꿀지 고민해야 한다. F.A.S.T.정부(Flat.Agile.Streamlined.Tech-enabled.)의 요체는 ①경계를 줄이고 ②민간과 적극협력하며 ③혁신기술을 적용한 ④유연하고 빠른 정책결정과 서비스 제공이다. 세계경제포럼에서 제시된 F.A.S.T.정부는 기존의 관료제 구조에서 벗어나 개방적이며 시민·시장과 소통하는 열린구조(Flat), 빠르고 유연한 의사결정과 문제해결(Agile), 정보나 데이터의 활발한 공유와 불필요한 중복(경계)제거(Streamlined), 4차 산업혁명의 혁신적 기술을 활용한 문제해결(Tech-enabled)을 특징으로 하는 미래정부다.

역설적이게도 코로나 팬데믹은 F.A.S.T.정부 설계의 실효성과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었다. 시민이 개발한 공적마스크 앱(APP),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카드사의 데이터, 우체국과 약국의 공급망 그리고 국민들의 자발적 협력이 더해져, 경계를 넘어선 F.A.S.T. 방식으로 마스크 대란은 해결되었다. 고질적 접속장애와 과도한 예약대기로 공분을 샀던 백신 사전 예약시스템 장애 또한, 혁신기술 적용과 부처경계를 초월한 민·관 파트너십으로 정상화되었다.

부처 간 관할이나 경계는 공무원에게나 중요할 뿐, 정책수요자인 국민은 그저 혼란 없이 마스크를 구매하고, 빠르고 안전한 백신 접종을 원할 뿐이다. 그러니 매번 부처 칸막이 이리저리 옮기는 것 말고 F.A.S.T.정부 설계로 무게중심을 옮겨보자.

F.A.S.T.정부로 무게중심을 옮기기 위한 첫걸음은 정부 규제 패러다임을 본질적으로 재구조화하는 일이다. 시기에 따른 차이는 있지만 정부규제는지속적으로 증가해 왔다. 2020년 신설·강화된 규제는 총 1515건으로 2019년(974건)에 비해 56%가, 최근 3개년 평균(1050건) 대비 44%가 증가하였다. 이 중 신설규제는 992건으로 2019년(543건)에 비해 82%의 폭증세를 보였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새로운 환경변화에 대응한 정부규제를 무조건 비난할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제의 확대 관성’과 (의도하지 않게) 범법자를 양산하고 혁신 생태계 구축을 방해하는 비현실적 규제는 분명 문제적 상황이다.

‘발전국가적 규제 방식’ 더이상 안 통해

규제의 건수 증가보다 더 큰 문제는 5년마다 정부외형은 변했어도 정부가 미리 정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발전국가적 규제방식’이 건재하다는 점이다. 4차 산업 혁명으로 산업지형의 지각변동이 일상인데, 정부가 무엇을 어떻게 미리 정한다는 것인가. 사활을 건 혁신 전쟁에 대비해 민간의 기술개발(R&D)투자 규모가 조(兆) 단위를 넘어서고, 단일 기업에 만 명에 육박하는 박사인력이 포진해 있는데 언제까지 발전국가적 정부규제를 계속할 것인가.

더욱이 유사한 사안을 두고 부처마다 상이한 논리로 규제하는 칸막이 규제(중복규제)는 더 심각하다. 최근 4차산업혁명의 중심인 데이터 범위를 두고 5개 부처(문체부, 특허청, 과기정통부, 중소벤처기업부, 산업통상부)가 각각 상이한 법안 5개를 발의한 일은 칸막이 규제 관성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웅변하기에 충분하다. 조정이나 조율 요구는 부처 방어논리에 묻히기 일쑤다. 일부 혁신기술(산업)영역에서 기존 규제를 면제(유예)하는 ‘규제샌드박스(sandbox)’를 도입했지만 정부의 규제 관성과 칸막이 규제의 벽을 넘는 일은 만만치 않다. 오죽하면 “규제샌드박스 희망고문”이라 하겠는가.

이렇듯 외형 중심의 조직개편은 부처의 칸막이 수호 심리를 자극하고, 파편적이고 중복적 규제만을 양산할 뿐이다. 이제 부처 칸막이 위치 말고 발전국가적 규제방식의 근본적인 개혁, 그리고 부처 경계, 민-관의 경계를 넘나드는 F.A.S.T. 식 정책조정을 중심 무대로 올리자. 이를 위해 대통령직속 규제개혁위원회, 국무조정실, 규제조정실과 같은 규제조정기구를 포함한 정책영역별 조정기구의 대대적인 개편을 ‘킬러 콘텐트’로 한 F.A.S.T.정부 설계를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다시 돌아온 선거의 계절, “21세기적 도전을 20세기적 아이디어로 분석하고 19세기적 방법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미국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의 일갈(一喝)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번 대선에도 또 다시, 우리가 직면한 21세기적 도전을(경계를 초월해 발생하는 사악한 문제), 20세기적 아이디어(큰정부, 작은정부)로 분석하고, 19세기적 방법(칸막이 중심의 관성적 정부조직개편)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언제나 그랬듯 ‘똑같은 일을 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2022년판 바보짓’ 으로 기록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