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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일 도발을 도발이라 말 못하는 文…"北의 덫에 걸렸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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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28일 “최근 북한의 담화와 미사일 발사 상황을 종합적이며 면밀히 분석해 대응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8일 오전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2021.9.28.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28일 오전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2021.9.28. 청와대사진기자단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6시 40분쯤 북한이 동해상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한 직후 소집된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회의 결과를 보고받은 자리에서 이같이 지시했다고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은 올해 들어 여섯번째다. 특히 이번달 들어 11~12일 신형 장거리 순항미사일, 15일 단거리 탄도미사일 발사 등 세번째 도발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픽] 2021년 북한 미사일 발사 일지

[그래픽] 2021년 북한 미사일 발사 일지

그런데 북한의 도발에 대한 문 대통령의 발언은 지난 15일을 전후로 큰 차이가 난다.

문 대통령은 지난 15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MB) 발사를 참관한 자리에서 “북한의 ‘도발’에 대응할 수 있는 충분한 억지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도발로 규정한 말이다.

문 대통령의 발언 직후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우몽하기 짝이 없다. 북남관계가 완전히 파괴될 수 있다”며 문 대통령이 언급한 ‘도발’을 문제 삼은 비난성 담화를 냈다.

그러자 문 대통령은 엿새 뒤인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 연설에서 종전선언을 제안했고, 23일 귀국 비행기에서 가진 기자 간담회에서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해 “미국이 대화를 단념하지 않을 정도의 저강도 긴장 고조”라고 했다.

김여정의 말 한마디를 사이에 두고 8일만에 북한의 같은 미사일 발사가 ‘도발’에서 ‘저강도 긴장’으로 후퇴한 모양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2월 방남한 당시 김여정 당 중앙위 제1부부장과 국립중앙극장에서 북한 삼지연 관현악단 공연을 보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2월 방남한 당시 김여정 당 중앙위 제1부부장과 국립중앙극장에서 북한 삼지연 관현악단 공연을 보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 연합뉴스

문 대통령은 이날 지시에서도 ‘도발’ 대신 ‘미사일 발사 상황’이라는 말을 썼다. 긴급 NSC 상임위 역시 “한반도의 정세 안정이 매우 긴요한 시기에 이뤄진 발사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다”면서도 미사일 발사를 도발로 규정하지 않았다.

 외교가에선 “임기 말 대화를 재개하려는 문 대통령이 북한의 반응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다”는 반응이 나온다.

김여정 부부장은 문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종전선언을 제안하자 “북남 정상회담도 건설적 논의를 거쳐 의의 있게 보기 좋게 해결될 수 있다”는 담화를 냈다. 김 부부장은 특히 “우리의 자위권 차원의 행동은 모두 위협적인 도발로 매도되고, 자기들의 군비증강 활동은 대북 억제력 확보로 미화하는 미국·남조선식 대조선(대북) 이중 기준은 비논리적이고 유치한 주장”이라며 ‘적대시 정책’과 북한의 군사적 움직임에 대한 ‘이중적 기준’의 철폐를 대화 재개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1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며 ″종전선언을 이뤄내면 비핵화 진전과 완전한 평화가 시작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문 대통령이 유엔 총회에서 종전선언을 촉구한 것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가 두번째다. 뉴스1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1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며 ″종전선언을 이뤄내면 비핵화 진전과 완전한 평화가 시작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문 대통령이 유엔 총회에서 종전선언을 촉구한 것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가 두번째다. 뉴스1

‘대화를 원하면 북한의 요구를 수용하라’는 주장에 가까운 말이다. 그럼에도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굉장히 의미있고 무게있게 받아들인다. 우리에게 (미국에 대한 대화 설득을 위한) 역할을 하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정영태 동양대 석좌교수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북한의 주장은 표면적으로 남북의 미사일 시험을 같은 기준으로 보자는 일면 타당한 말로 들릴 수 있지만, 여기엔 치밀한 전략이 담겨있다”며 “일단 정부가 미사일 발사를 도발이 아니라고 규정할 경우 북한은 이를 근거로 앞으로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 보유까지 한국 정부가 인정하도록 강요하는 상황을 만들어 갈 것”이라고 지적했다.

28일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북한 단거리 미사일 발사 관련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북한은 이날 오전 6시40분쯤 북한 자강로 무평리 일대에서 '단거리 미사일'로 추정되는 발사체 1발을 동해상을 향해 쐈다. 뉴스1

28일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북한 단거리 미사일 발사 관련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북한은 이날 오전 6시40분쯤 북한 자강로 무평리 일대에서 '단거리 미사일'로 추정되는 발사체 1발을 동해상을 향해 쐈다. 뉴스1

정 교수는 이어 “북한은 임기 말 대화 재개를 원하는 문 대통령의 상황을 활용해 도발을 도발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일종의 '덫'에 빠뜨리는 전략을 썼다”며 “특히 이번 도발은 리트머스 시험지 위에 문 대통령을 올려놓고 반응을 살핀 뒤 대화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노골적인 의도가 담긴 측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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