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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팔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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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경희 기자 중앙일보 P디렉터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쿠팡플레이 오리지널 ‘SNL코리아’에서 인턴기자역을 맡은 배우 주현영이 화제다. 인턴으로 대표되는 사회 초년생의 처지를 실감 나게 풍자해서다. 재난지원금을 국민 88%에만 지급하는 기준이 뭐냐는 앵커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저의 의견은 팔팔이라는 숫자가 팔팔한 느낌도 있고, 올림픽도 88올림픽이 있잖아요. 팔팔이라는 숫자가 좋은 기운·느낌이다. 정부의 깊은 뜻은… 하, 미치겠다.”

누구나 미숙한 시절이 있기에 그의 연기에 공감할 수 있을 듯하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한국에서 88이 희망적이고 상징적인 숫자가 된 것도 사실이다. 중국에서는 8의 발음 ‘바’가 ‘돈을 벌다(發財·파차이)’의 ‘파’ 와 비슷해 행운의 숫자로 통한다. 한자 문화권에선 ‘팔자’ 즉, 생년월일시를 나타내는 여덟 글자로 운명을 점치는 문화도 퍼져있다.

그러나 1988년생이 성인이 되던 2007년 우석훈·박권일의 책『88만원 세대』가 출간되면서 88의 의미는 확 전환됐다. 20대는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소모되며 월 88만원밖에 못 벌 거라 전망한 암울한 보고서였다.

최근 88만원 세대 최대 잭폿이 터졌다. 만 6년 일하고 대리로 퇴사한 1990년생 곽모씨는 퇴직금 세전 50억원을 수령했다. 월급이 300만 원대였으니 근로기준법상 퇴직금 최저기준 약 2250만원의 220배가 넘는다. 그는 아버지 곽상도 국회의원의 권유로 산업디자인 전공과는 무관한 부동산개발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성남 대장동 개발 사업 특혜 의혹이 불거진 화천대유자산관리다.

곽씨는 자신을 “치밀하게 설계된 오징어 게임의 말”이라면서도 “제 인생은 제가 선택하고, 제가 책임지고, 제가 그려왔다”고 강조했다. 그는 총무, 보상 업무 지연, 민원까지 해결한 ‘팔방미인’이라 회사가 정당한 대가를 줬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50억원이면 화천대유 전 직원 16명의 5년 총임금과 비슷하고, 이 회사가 퇴직금 재원으로 쌓아둔 충당금 약 14억원의 3배가 넘는다.

코인 투자로 50억원을 벌었다면 차라리 팔자 좋다고 하겠지만, 퇴직금 50억원은 팔자 운운하기도 어렵다는 걸 곽씨만 모르는 모양이다. ‘게임의 말’에 50억원을 주는 회사는 없다. 곽씨가 빗댄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참가자 목숨값은 1인당 1억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