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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인사이드]종전선언 받아 든 북한, 핵 시대를 이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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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2월 방남한 당시 김여정 당 중앙위 제1부부장과 국립중앙극장에서 북한 삼지연 관현악단 공연을 보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2월 방남한 당시 김여정 당 중앙위 제1부부장과 국립중앙극장에서 북한 삼지연 관현악단 공연을 보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1일(현지시간)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종전선언 제안을 읍소했다. 이에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물 만난 고기처럼 우리 정부를 세차게 코너로 몰아붙이고 있다.

북한은 종전선언 제안 이틀만인 24일 오전 이태성 외무성 부상을 통해 “미국의 적대시 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 종전은 열백 번 선언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며 “아직은 종전 선언할 때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종전선언은 한 마디로 종잇장에 불과하다는 북한의 기존 입장을 반복한 셈이다.

그런데 오후 들어 김 부부장은 “종전선언이 흥미 있는 제안이고 좋은 발상”이라면서도 선결 조건으로 “적대시 정책 철회”를 반복했다. 또한, “한국이 이런 조건을 마련하면서 앞으로 매사 숙고하며 적대적이지만 않으면 남북 사이 관계회복에 대해 논의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유엔 총회장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유엔 총회장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청와대

김 부부장은 마치 주종관계처럼 한국에 명령하듯 하대한 것이다. 일상의 표현이라고 보기에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돌이켜보건대 이쯤 되면 퍼즐이 하나씩 맞춰진다. 정부는 지난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일에 뜬금없이 남과 북이 통신선을 복원한다고 발표했다. 게다가 그동안 남북 정상 간 10여 차례 서신 왕래를 이어 간 결과물이라고 친절한 설명도 곁들였다.

이윽고 김 부부장은 불쑥 나타나서는 ‘통신선을 복원해줬는데 분위기 깨는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하지 않으면 재미없을 것’이라고 협박도 했다.

설상가상 한국에선 국회에 불려온 국가 최고 정보기관장이 김 부부장의 생떼에 동조했다. 연합훈련을 취소하라는 북한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으면 북한이 군사도발을 할 것이라며 북한 편을 들어 줬다. 범여권 국회의원 74명은 연판장으로 연합훈련 연기를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북한이 15일 철도기동미사일연대 검열사격 훈련을 진행했다고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16일 보도했다. 노동신문

북한이 15일 철도기동미사일연대 검열사격 훈련을 진행했다고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16일 보도했다. 노동신문

마침내 김 부부장은 연합훈련 시작을 빌미로 통신선을 다시 폐쇄했다. 또한, 기억조차 하기 싫은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의 주역인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을 내세워 “엄청난 안보위기”를 “시시각각으로 느끼게 해 줄 것”이라고 협박했다.

이러한 전주곡에 이어 북한은 열병식으로 내부 군기 잡기식 집안 단속을 한 뒤 곧바로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순항미사일과 열차 이동식 탄도미사일 도발로 이어 갔다. 북한의 행보는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앞서 주장한 것과 유사하다.

북한은 이제 종전선언은 물론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재설치와 정상회담 문제도 건설적으로 논의할 수 있다며 미끼를 던지며 병도 주고 약도 준다.

문재인 대통령(오른쪽 두 번째)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 두 번째)이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문에 서명하고 있다. 왼쪽은 김 위원장 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오른쪽은 조한기 당시 청와대 의전비서관.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오른쪽 두 번째)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 두 번째)이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문에 서명하고 있다. 왼쪽은 김 위원장 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오른쪽은 조한기 당시 청와대 의전비서관. 청와대사진기자단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는 북한이 우리 국민에 거듭 사과를 해도 이미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할 수 없는 명백한 도발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9ㆍ19 남북군사합의 위반은 아니라고 한다. 정부가 나서 다시 지어줄 것이라는 상상은 하고 싶지 않다.

당장 실현 가능성이 낮은 종전선언 제안은 북한이 벌여 온 수많은 ‘위장 평화 쇼’와 중첩돼 걱정이 든다. 남북한이 상호 필요에 따라 조율돼 가는 듯한 의구심도 든다.

지난해 6월 개성 공단에 위치한 남북 연락사무소 건물이 폭파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지난해 6월 개성 공단에 위치한 남북 연락사무소 건물이 폭파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지금은 문재인 정부 임기 말이면서 대통령 선거를 앞둔 경선 시기에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오비이락’을 감수하면서 사생결단으로 나서는 고집이나 각오를 가진 것은 아닐까. 기우로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이제 북한은 핵무기 억제력과 군사적ㆍ정치적ㆍ전략적 억제력 외에도 우리 국민을 분열시키는 ‘분노의 억제력’까지로 확장했다. 모두의 탓이다. 핵무기를 가진 북한이 한국을 볼모로 한 재래식 군사도발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임계변수가 될 날이 가까워지는 것 같다.

볼품없이 초라한 북녘땅에 실존하는 핵무기는 저명한 폴 브래큰(Paul Bracken) 교수가 주장하는 제2차 핵 시대(The second Nuclear Age)의 동아시아지역 불안정을 야기하는 주범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아 가는 것 같다.

미국이 이내 북한의 핵무기를 철저히 관리하지 못하면 북한이 제2차 핵 시대를 관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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