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김정하의 시시각각

미국 가서 중국 역성든 외교장관

중앙일보

입력 2021.09.27 00:41

지면보기

종합 30면

“중국이 공세적(assertive)이라는 표현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다. (…) 20년 전 중국이 아니다. 우리는 중국이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을 듣도록 노력해야 한다.”
 처음엔 대표적 친중 국가인 파키스탄의 외교관리가 한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한국 외교부 장관의 발언이다! 그것도 지금 중국에 잔뜩 날을 세우고 있는 미국의 한복판에 가서 한 얘기다.

“중국이 한국엔 강압적이지 않다”
‘중화적 질서’에 한국만 무사할까
호주 학자 “중국에 겁먹은 한국”

정의용 외교부 장관(왼쪽)이 22일(현지시간) 외교ㆍ안보 분야 싱크탱크인 미국외교협회(CFR) 초청 대담회에서 파리드 자카리아 CNN 앵커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정진우 기자

정의용 외교부 장관(왼쪽)이 22일(현지시간) 외교ㆍ안보 분야 싱크탱크인 미국외교협회(CFR) 초청 대담회에서 파리드 자카리아 CNN 앵커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정진우 기자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22일(현지시각) 뉴욕에서 열린 미국외교협회 초청 대담회에서 “중국이 최근 공세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사회자의 지적에 “그건 당연하다. 중국은 경제적으로 더욱 강해지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또 사회자가 미국·한국·일본·호주를 ‘반중 블록’으로 분류하자 정 장관은 “그것은 중국 사람들이 말하듯이 냉전시대 사고”라며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고도 했다.

한국 외교부 장관이 쿼드(Quad,미국·일본·인도·호주)에 이어 오커스(AUKUS,미국·영국·호주)까지 띄우며 대중 압박에 총력을 쏟는 미국의 외교정책을 정면에서 걷어찬 셈이다. “중국 대변인이냐”는 비난이 쏟아지자 정 장관은 “어떤 국가 블록이 특정 국가를 겨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미국에 있다고 그런 얘기 못 하냐”라고 항변했다. 그러면서 “중국이 강압적(coercive)이라고 여러 나라가 우려를 표시하는데 중국이 우리에겐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국이 한국에 강압적이지 않다고? 황당한 얘기다. 정 장관은 2016년 한국이 사드 배치를 결정하자 중국이 어떻게 나왔는지 애써 망각한 듯하다. 당시 중국 정부는 한한령(限韓令)을 내려 K팝·드라마·예능 등 한국의 문화상품 수입을 전면 중단시켰고,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에 불매운동 등으로 전방위 압박을 가했다. 경북 성주에 사드 부지를 제공한 롯데그룹은 중국에서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받기도 했다.

중국은 한국의 사드배치 결정에 대한 보복으로 중국 관광객들의 방한을 금지시켰다. 2017년 추석 연휴때 썰렁한 제주도의 관광지 모습.  최충일 기자

중국은 한국의 사드배치 결정에 대한 보복으로 중국 관광객들의 방한을 금지시켰다. 2017년 추석 연휴때 썰렁한 제주도의 관광지 모습. 최충일 기자

게다가 정 장관의 인식은 미국과 중국을 동등한 가치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미국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보장된 민주국가이고, 중국은 공산당 1당 독재의 전체주의 국가다. 홍콩 민주화 탄압에서 드러나듯 민주공화국인 한국의 정신은 공산당의 이념과 어울리기 힘들다. 게다가 지금 중국은 주변국을, 나아가 전 세계를 ‘중화적 질서’에 편입하겠다는 팽창주의 노선을 걷고 있다. 그러다 보니 중국의 위협을 느낀 나라들이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생겨난 게 쿼드와 오커스다.

정 장관은 인도·일본·호주와 달리 한국은 ‘중화적 질서’에서 무사할 것으로 믿는 모양이지만 어림도 없다. 가령 문재인 정부는 남중국해 문제를 강 건너 불구경하지만, 실제로 중국이 남중국해를 지배하는 일이 벌어지면 한국의 원유 수송 루트를 중국이 장악하는 셈이어서 에너지 안보에 치명적 위기가 닥친다.

조 바이든(왼쪽)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월 12일(현지시각)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와 함께 쿼드 첫 정상회의를 열었다. [AFP=연합뉴스]

조 바이든(왼쪽)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월 12일(현지시각)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와 함께 쿼드 첫 정상회의를 열었다. [AFP=연합뉴스]

호주 학자 클라이브 해밀턴 교수(찰스 스터트대)는 2018년 저서 『중국의 조용한 침공(Silent Invasion)』에서 중국이 호주 지도층을 은밀히 매수하고 호주를 구워삶으려 한 실태를 폭로해 국제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번에 중국 관영 환구시보가 정 장관 발언을 칭찬했다는 뉴스를 접하니 새삼 해밀턴 교수의 경고가 떠오른다.

 “이미 한국의 재계에는 베이징의 만족을 유일한 목표로 삼고 활동하는 강력한 이익집단들이 자리 잡고 있다. 베이징은 또 한국의 학계와 정계, 문화계, 언론계 지도층 전반에 걸쳐 베이징 옹호자와 유화론자들을 확보했다. (…) 호주 정부는 베이징의 괴롭힘에 맞섰지만 한국의 정치지도층은 지레 겁을 먹고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나약한 태도를 유지한다. 만약 한국 정부가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의 독립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위험한 도박을 하는 셈이다.”(『중국의 조용한 침공』 한국어판 서문)

김정하 정치디렉터

김정하 정치디렉터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