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장덕진의 퍼스펙티브

내년 3월 대선까지 ‘위드 코로나’ 전환 쉽지 않을 듯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바이오폴리틱스와 한국 정치

장덕진의 퍼스펙티브

장덕진의 퍼스펙티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마스크를 쓴 모습을 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는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원래 마스크를 쓰지 않기로 유명한 정치 지도자는 푸틴 말고도 미국의 트럼프, 영국의 보리스 존슨,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등이 있었는데, 이 세 사람은 모두 코로나19에 확진된 후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 이미 지난해 5월에 크렘린은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뚫렸고 그의 대변인을 포함한 측근들이 줄줄이 확진됐지만, 푸틴은 끝내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그뿐인가. 푸틴은 걸핏하면 웃통을 벗고 근육을 드러낸 모습을 공개한다. 젊은 여성들은 선정적인 복장의 사진으로 달력을 만들어 그에 대한 지지를 표현한다. 어떻게 몸의 노출이 정치인과 지지자 사이 교감의 수단이 될 수 있을까. 러시아 여성 밴드의 노래 ‘푸틴 같은 남자’의 가사를 보면 짐작이 간다. ‘푸틴 같은 남자를 원해. 기운이 넘치지. 푸틴 같은 남자를 원해. 술도 안 마시지. 푸틴 같은 남자를 원해. 날 슬프게 하지 않아. 푸틴 같은 남자를 원해. 날 버리지도 않지.’

코로나 시대 세계는 인구집단 통제하는 바이오폴리틱스 경연장
한국인은 감염병에 대한 우려와 민감성에서 세계 최고 수준
1일 확진자 수보다 의학·경제·인권적 가치 종합적 고려해야
기존 지형서 벗어나려 하지 않을 것…K방역은 비교적 성공

믿기지 않겠지만, 이 노래는 2002년 러시아 음악 차트 1위를 차지했다. 과거 왕의 몸이 그랬듯이, 푸틴의 몸은 강건한 국가의 정치적 몸이 됐고 누구나 꿈꾸는 남편감인 그는 온 러시아의 남편이다. 푸틴은 지지자의 몸속에 들어와서 그들을 통치한다. 푸틴이 마스크를 쓰면 국가가 마스크를 쓴 것이다. 그래서 푸틴은 마스크를 쓸 수 없다.

푸틴의 ‘노 마스크’는 극단적 사례

인구집단의 생명을 통치하는 것,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말한 바이오폴리틱스(Biopolitics·생명정치)의 극단적 형태가 푸틴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커뮤니케이션 교수인 제로엔 드 클로에는 팬데믹 이후 세계는 바이오폴리틱스 경연장이 됐다고 주장한다. 누가 인구집단을 더 잘 통제하느냐는(혹은 더 잘 통제 당하느냐는) 세계적 경쟁이다. 이것은 도쿄 올림픽조차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만든 국가들 간의 진짜 경쟁이다.

우리는 K방역이 세계 최고라고 자부한다. 실제로 국제적 지식 컨소시엄인 ‘딥 날리지 그룹(Deep Knowledge Group)’을 비롯한 여러 기관의 평가에서 한국은 최상위권에 속한다. 하지만 1등은 아니다. 한국인은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겠지만, 이 기관의 평가에서 한국은 10등인데 일본과 중국이 각각 5등과 7등으로 우리보다 위에 있다.

자기가 1등이라고 생각하는 국가(혹은 지역)는 우리만이 아니다. 드 클로에의 분석을 좀 더 따라가 보자. 대만은 세계가 마스크 대란을 겪고 있을 때 원활한 마스크 수급은 물론이고 대만 마스크의 디자인과 다양성도 세계 1등이라고 자부했다. 이 자부심에 힘입어 세계보건기구(WHO) 독자 가입을 추진하는 데까지 나아갔으나, “중국은 이미 가입했다”는 싸늘한 대답을 들어야만 했다.

중국인은 유럽의 느려터진 대응을 지켜보면서 “왜 중국 방식을 베끼지 않느냐”라며 답답해했다. 허베이성에서 했던 것처럼 강력한 락다운으로 코로나19 감염을 재빨리 누그러뜨린 중국의 정답이 이미 나와 있는데, 남이 해놓은 숙제를 베끼지도 못하냐는 답답증이었다. 중국이 다른 나라에 의료진을 보내기 시작하자 “중국은 세계를 구하는데 미국은 자기 자신도 구하지 못한다”는 자부심이 터져 나왔다.

홍콩도 마찬가지로 마스크와 개인위생의 세계적 모범이자 중국 본토와는 차원이 다른 과학적 합리성을 내세웠다. 바이오폴리틱스와 지오폴리틱스(지정학)가 함께 엮여있다. 코로나 이전에도 존재하던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코로나 시대를 맞아 인구집단에 대한 통제를 누가 더 잘하느냐는 바이오폴리틱스 경쟁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고신뢰 사회’ 스웨덴의 선택

바이오폴리틱스의 극단적 형태인 러시아의 반대쪽 끝에는 스웨덴이 있다. 스웨덴은 마스크를 권장하지 않고 일상생활은 물론 수백 명이 모이는 행사까지도 허용하는 느슨한 방역과 소위 ‘집단면역’ 정책으로 많은 희생자를 냈고 수많은 비판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좀 따져보아야 할 의문들이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1인당 GDP 5만 달러가 넘고 거의 모든 국가 지표 평가에서 세계 3위 이내에 들며 국가는 곧 ‘국민의 집’이라는 최고의 복지국가 스웨덴이 정말로 이렇게 한심한 것일까.

스웨덴의 자체 평가는 다르다. 스웨덴은 다른 모든 정책과 마찬가지로 감염병 대응도 분권화한 체계를 거치며 총리가 아니라 전문가 자문그룹이 정책의 주도권을 가진다. 모두가 외치는 과학 기반 정책의 모범이다. 국가 면역학자인 안데르스 테그넬이 그 수장이다. 헌법에 따라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정부는 락다운을 명령할 수 없다. 거리두기와 재택근무를 일관되게 강조하지만 강제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스웨덴이 세계 1위의 고신뢰 사회라는 배경도 작용한다. 한국인 중 모르는 사람을 신뢰할 수 있다는 사람은 30%도 안 되지만 스웨덴은 75%다. 소위 ‘넛지(nudge)’, 즉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선택을 은근히 유도하는 정책이 먹힐 수 있다는 뜻이다. 테그넬은 집단면역은 정책의 목표가 아니라 그 부산물일 뿐인데 외신이 왜곡하고 있다고 분개한다. 코로나로 인한 죽음이나 다른 죽음이나 존엄하기는 마찬가지인데, 다른 나라들이 오히려 코로나에 대한 정치화한 관심 집중으로 다른 죽음을 가벼이 여긴다고 비판한다.

실제로 스웨덴의 전체 사망률은 잘 관리되는 편이고 확진자 추이도 최근 급감해서 독일보다 낮아진 상태이다. 스웨덴이 비용을 할부로 치러왔다면, 다른 나라들은 방역정책을 완화하는 과정에서 일시불로 치르게 될 것이라서 어떤 선택이 옳았는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라고도 한다.

얼마 전 어느 기자와 대화 중에 문재인 정부를 한마디로 정의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는 방역 정부입니다”라고 답하자 당황한 기색이었다. 아마도 정치적 양극화나 대북 정책, 부동산 정책, 적폐 청산 같은 답을 예상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일관되게 추진했고 일정 수준의 성과를 낸 정책은 누가 뭐래도 방역이다. 게다가 방역은 정치적으로도 현 정부를 떠받친 핵심 요인이다. 4·15 총선에서 180석 폭주 여당을 만들어낸 것은 방역 못 하니 뽑지 말아야 한다는 야당의 선동이었다. 선거운동 기간에 방역 성적표가 급변하는 바람에 국민은 ‘방역 잘하니 뽑아줘야 한다’는 뜻으로 새겨들었다.

문 정부가 그나마 성과 낸 방역

게다가 한국인은 감염병에 대한 우려와 민감성이 세계 최고 수준이고 자신의 몸에 대한 의료적 통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동네 병원에 갔다가 벽에 붙어있는 마늘 주사·우유 주사·비타민 주사 중에 한 가지를 쇼핑하듯 골라잡아서 놔달라고 하는 나라가 한국 말고 어디 또 있을까. ‘좋은 백신’ 못 구해왔다고 호통치는 것도 효과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 좋은 백신 구해왔으니 없었던 일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국가 안보를 떼어낼 수 없듯이, 문재인 대통령과 ‘생명 안보’를 떼어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바이오폴리틱스 관점에서 볼 때 문 대통령은 푸틴만큼은 아니지만 성공한 정치 지도자가 됐고, 아마도 그의 지지율은 임기 끝까지 유지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위드 코로나’는 별개의 문제다. 누구나 위드 코로나를 외치지만, 1일 확진자 몇 명이 되면 위드 코로나로 전환할 수 있을까. 지금의 20분의 1 수준인 100명이라고 해보자. 100명과 101명의 차이는 뭔가. 이미 100명 이하였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때는 왜 위드 코로나를 하지 못했나. 질문이 꼬리를 물 것이다. 100명이든 1000명이든 확진자가 발생하는데도 위드 코로나로 전환한다는 것은 지금처럼 1일 확진자 수에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의학적·경제적·인권적 가치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는 뜻이다. 정치적 비판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스웨덴처럼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냉철해야 가능한 일이다.

위드 코로나는 ‘완화’가 아닌 ‘경로 변경’이다. 대선은 내년 3월이다. 기존에 형성된 바이오폴리틱스 지형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는 뜻이다. 위드 코로나까진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