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슘페터식 기업가정신 북돋아 성장잠재력 키워야

중앙일보

입력 2021.09.27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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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코로나19 저성장 시대 극복하는 법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최소 지난 10년간 신문 경제면을 다시 더듬어보면 그 어느 한 해에도 산업현장이 위기에 빠졌고, 경제전망이 불안하다는 소식이 언급되지 않은 때가 없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적으로 장기 불황의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저성장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의미로 ‘뉴 노멀’이라는 단어가 일상용어가 됐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2000년대 이후 잠재성장률이 매년 0.2% 내외로 하락하는 장기적 추세가 코로나 직전까지 계속됐다. 이처럼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경제가 점차 체질이 약화하던 중에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감염병 사태로 단기적인 위기가 겹쳐졌다.

케인스식 단기부양책 한계 노출
비대면 사회 기술경쟁 뜨거워져
‘창조적 파괴’로 성장엔진 돌려야
혁신 친화적인 스마트정부 절실

장·단기 위기가 겹친 불확실 사회

1930년대 대공황 당시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지자 거리 구직에 나선 미국 실업자들. [중앙포토]

1930년대 대공황 당시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지자 거리 구직에 나선 미국 실업자들. [중앙포토]

현재 상황은 장·단기 위기가 동반한 상태다. 코로나19 때문에 잘 보이지 않을 뿐 장기적 성장잠재력의 위기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단기적 위기를 극복하느라 장기적인 성장 정체에 대한 대응을 미루다 보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 보여주듯 나중에 회복이 돼도 만성적인 저성장의 늪에 빠질 수 있다.

케인스

케인스

코로나19 위기를 맞이하여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모든 국가가 케인스식 처방이라 불리는 비슷한 대응을 하고 있다. 케인스는 불황이 유효수요가 부족한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어떤 수를 쓰든 정부재정을 신속하게 풀어 수요를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로나 위기 아래에서 모든 국가가 확장재정을 펴면서 죽은 케인스가 부활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그 결과 전 세계적으로 실물경기와 상관없이 증시가 호황을 이루고, 각종 자산가격이 상승하면서 양극화도 덩달아 심해지는 등 예상했던 부작용도 현실화하고 있다. 경제 전반에 거품이 끼고 있다는 경고음이 이곳저곳에서 울린다.

코로나 위기에 모두가 정신이 쏠려있는 사이 수면 저 아래에서는 장기적인 기술 패러다임의 변화가 꿈틀대고 있다. 데이터경제 등장과 비대면 산업 발전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기업들이 빠르게 부상하면서 산업 곳곳에서 기존 기업과의 마찰이 커지고 있다. 게다가 지난 10년간 조금씩 예열하고 있던 미·중간의 기술패권 전쟁도 본격적으로 불을 뿜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거대한 지각판이 움직이듯 글로벌 가치 사슬이 큰 마찰음을 내면서 재편되고 있다. 이런 기술 패러다임의 변화는 단지 속도가 좀 더 빨라졌을 뿐 지난 10년간 꾸준히 진행돼오고 있는 중장기 트렌드다.

불황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단기적으로 케인스식 처방이 필요한지 모른다. 그러나 장기적인 성장잠재력의 위기도 결코 뒤로 미룰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케인스가 아니라 슘페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인간 본성에 내재한 혁신 욕구

슘페터

슘페터

조지프 슘페터(1883~1950)는 시장경제 체제가 기술혁신을 기반으로 성장하는 원리를 ‘발견’했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혁신에 대한 욕구를 가진 ‘기업가’가 기술혁신을 일으킨다. 그렇게 탄생한 새로운 기술과 기업은 낡은 기술과 기업을 시장에서 밀어내는 ‘창조적 파괴’를 일으킨다. 그 결과 새로운 소비가 일어나고 경제는 성장한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해서 발견이라고까지 할 게 있나 싶지만, 슘페터가 명저『경제발전의 이론』(1911)에서 명쾌하게 보여주기 전까지 기술혁신과 경제성장의 관계는 별개의 것으로 여겨졌다.

‘기업가(entrepreneur)’라는 말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사람도 슘페터다. 기업가는 자신만의 세계관을 펼치고자 하는 의욕과 상업적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욕구, 혹은 순수하게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고자 하는 희망 등 혁신의 비전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 욕구는 바로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것이다. 슘페터는 놀라운 통찰력으로 시장경제 체제가 ‘기업가 정신’과 ‘창조적 파괴’라는 성장엔진을 시스템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기업가 정신을 억누른 중세시대나 전근대적 사회, 자유로운 시장경쟁을 허용하지 않는 계획경제 아래에서 왜 경제가 성장하지 않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경제시스템 내부에 기업가정신과 창조적 파괴라는 성장의 엔진이 존재하지 않거나 차갑게 식어있기 때문이다. 이 두 단어가 성장잠재력을 결정하는 핵심 키워드다.

미국과 중국의 장기 발전 방안

슘페터의 시각은 혁신공급을 중시하는 성장정책의 기반이 된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올해 6월 미국 상원이 내놓은 ‘미국 혁신 및 경쟁력 법안(U.S. Innovation and Competition Act)’이나 최근 중국이 발표한 ‘2035 장기발전계획’ 등이 대표적인 예다. 모두 반도체·AI·바이오·우주 등 핵심기술에 대한 집중투자로 국가의 혁신기반을 올리는 데 초점을 둔 국가전략이다.

미래 기술분야는 공통적으로 불확실성이 크고, 수익이 장기적으로 발생하는 특성이 있다. 게다가 여러 산업의 혁신에 두루 영향을 미치는 공공재적 성격이 강해 민간의 자발적 투자를 기대하기 어려운 분야다. 이때 국가가 나서서 미래의 기업가를 위해 혁신의 씨앗을 미리 뿌려두자는 것이다. 이와 함께 교육혁신에 투자하는 것 역시 미래 세계를 열어갈 기업가의 싹을 키우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유럽도 뒤질세라 그린뉴딜을 내세우면서 새로운 에너지 패러다임에 필요한 기술혁신 모판을 만들기 위해 집중투자를 시작했다.

코로나 위기의 와중에도 미국·유럽·중국 등이 기술혁신의 기반 마련을 목표로 국가적인 투자를 하는 것은 단기적 위기 대응을 넘어 위기 이후의 성장잠재력을 미리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확장재정이라고 하지만, 단순히 규모만 늘리는 것이 아니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단기처방과 장기처방을 함께 섞어 복합처방을 하고 있다.

슘페터가 주창한 기업가 정신과 창조적 파괴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있다. 창조가 아니라 파괴의 쪽에 선 사람이 짊어져야 할 고통을 분담하는 일이다. 실제로 중장기적으로 볼 때 실업은 대부분 새로운 기술혁신으로 인한 산업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생긴다. 4차 산업혁명의 도래로 이 기술적·구조적 실업의 위험은 더 높아질 전망이다. 게다가 지금과 같은 복합위기 상황에서는 상황이 더 심각할 수밖에 없다.

이런 고통을 창조라는 햇볕에 어쩔 수 없이 따라붙는 그림자 정도로 취급할 문제가 아니다. 파괴의 과정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이 무사히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사회는 그 어떤 창조적 파괴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 변화를 안심하고 받아들이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도전에 나서는 기업가들이 많아지기 위해서는 사회 안전망이 든든해야 한다. 어려운 체조 동작을 새로 익히려고 할 때 부상을 방지해줄 매트가 푹신하고 든든해야 자신 있게 점프를 시도해볼 수 있는 것과 같다.

평생학습 투자 크게 늘려가야

또한 새로운 역량이 필요할 때 언제 어디서나 낮은 비용으로 배울 수 있도록 평생학습 투자를 획기적으로 늘려야 한다. 이런 안전망과 평생학습에 대한 투자 역시 성장잠재력을 키우기 위한 정책의 핵심으로 확장재정 속에 크게 반영돼야 할 중장기 처방이다.

슘페터는 노동과 자본 같은 유형적 투입이 아니라 무형의 기술혁신에 기반을 두어 성장하는 혁신국가를 꿈꿨다. 기업가 정신과 시장의 창조적 파괴 메커니즘이 민간영역인 것은 분명하지만, 민간과 겹치지 않는 곳에서 정부의 일 또한 분명히 있다. 장기적인 미래를 준비하는 국가적 미션을 제시하고, 좀비기업이 아니라 혁신적인 시도를 하고자 하는 기업가를 선별해서 지원하며, 인재양성처럼 미래의 혁신 인프라에 투자하는 일 등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일을 잘 해내려면 기술혁신에 대한 정부의 이해가 높아야 하고, 혁신정책 실행역량 또한 강화해야 한다.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 논란이 많지만, 혁신국가 관점에서 보면 혁신 친화적인 스마트한 정부가 핵심이다. 과연 우리 정부의 역량이 얼마나 준비돼 있는지 꼼꼼히 챙겨봐야 할 때다. 당장 600조가 넘는 내년도 정부 예산안이 국회 심의를 기다리고 있다. 안타깝게도 코로나 위기 대응과 정치 일정에 묻혀 성장잠재력 제고를 위한 국가적 투자계획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언론보도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2022년은 전 세계 모든 국가가 코로나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분기점이 될 것이다. 위기 가운데 있는 지금, 성장잠재력을 어떻게 준비했는지에 따라 코로나 이후 국가의 경제 순위가 바뀔 것이다. 급한 일은 잘 보이지만, 중요한 일은 뒷전에 밀려나기 마련이다. 단기적인 위기 극복을 넘어 기업가 정신과 창조적 파괴라는 성장의 엔진이 식지 않도록 중장기적인 혁신투자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급하지 않은 듯 보이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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