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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시선

흙수저 무령왕, 금수저 무령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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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맞아 열린 특별전에 전시된 '묘지석'. [뉴스1]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맞아 열린 특별전에 전시된 '묘지석'. [뉴스1]

백제 25대 임금 무령왕(武寧王·462~523)에서 ‘무령’은 시호(諡號)다. 시호는 죽은 이의 공적을 기리려고 새로 지은 이름이다. 아들 성왕이 붙인 ‘무령’은 무력으로 주변을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로, 생전에 일본·중국과 교류하며 백제 부흥의 기틀을 다진 무령왕과 아귀가 잘 맞는다.

무령왕릉 발굴 50년 특별전 주목 

 요즘 무령왕 재조명이 활발하다.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내년 3월 6일까지)이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시작됐다. 출토 유물 5232점이 공개됐다. 1971년 역사적 발굴 이후 유물 전체가 한자리에 모인 건 처음이다. 6세기 초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문화를 일군 백제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무령왕릉 특별전에 나온 무령왕 관꾸미개. 불꽃 문양이 힘차고 정교하다. [뉴스1]

무령왕릉 특별전에 나온 무령왕 관꾸미개. 불꽃 문양이 힘차고 정교하다. [뉴스1]

 추석 직전, 공주박물관을 찾아갔다. “앞으로 한 세대가 지나기 전까지 이런 전시는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한수 공주박물관장의 자신감에 귀가 솔깃했다. 금빛 반짝이는 관꾸미개·목걸이·팔찌·신발, 신선이 노닐 듯한 은잔, 위풍당당한 목관과 베개·발받침, 무덤을 지키는 국내 유일의 돌짐승(鎭墓獸), 각종 청동제기와 유리장신구 등등 유물 하나하나에 흠뻑 빠졌다. ‘옛다, 이거 받아라/ 한꺼번에 주시는 5천 개의 선물/ 네, 네, 받지요, 받겠습니다’라는 나태주 시인의 헌시가 과장은 아니었다.
 화려하고 섬세한, 그러면서도 겸손하고 담백한 유물 가운데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바로 묘지석이다. 무령왕과 왕비의 인적사항을 간략하게 새긴 돌판 두 개다. 무령왕 묘지석(가로 41.5㎝, 세로 35.2㎝, 무게 17.5㎏) 맨 앞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嶺東大將軍 百濟 斯麻王)’이라고 적혀 있다. 영동대장군? 사마왕? 무령왕의 정체를 푸는 두 가지 키워드다.

위기의 백제 되살려낸 힘 엿보여

무령왕릉을 지켜온 상상의 동물 진묘수. 죽은 사람의 영혼을 신선 세계로 인도한다. [연합뉴스]

무령왕릉을 지켜온 상상의 동물 진묘수. 죽은 사람의 영혼을 신선 세계로 인도한다. [연합뉴스]

 우선 사마는 무령왕의 생전 이름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무령왕은 일본 규슈의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 사마는 섬을 뜻한다. 현재 일본어로 섬은 ‘시마(しま)’다. 무령왕은 요즘 말로 난민 출신이다. 물론 사연이 있다. 475년 고구려에 서울(한성)을 빼앗긴 백제는 공주(웅진)로 수도를 옮긴다. 이때 많은 귀족과 백성이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무령왕은 그들의 후예다. 여러 견해가 있지만 한성백제 시대를 마감한 개로왕의 동생 곤지의 아들이라는 게 주류설이다.
 의문이 남는다. ‘퇴각 정부’ 웅진에서 무령왕은 어떻게 백제를 다시 일으킬 수 있었을까. 백제문화의 고갱이인 무령왕릉은 국력의 뒷받침 없인 탄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무엇보다 무령왕의 통합적 리더십과 그에 따른 유연한 외교를 꼽는다.
 정재윤 공주대 교수는 무령왕을 ‘흙수저’에 비유했다. 일본에서 태어난 도왜인(渡倭人)인 데다 이복동생 동성왕에 이어 마흔이란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무령왕은 어린 시절 힘든 시간을 잊지 않고 국정 안정에 주력했다. 제방을 쌓고, 수리시설을 고치며 농업생산력을 키웠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놀고먹는 자들’을 몰아 농사를 짓게 했다.
 또 한강 유역의 고구려를 잇달아 공격하며 무너진 국가 자존심을 살렸고, 남쪽으론 가야 일대까지 진출하며 지방세력을 끌어들였다. 김영심 한성백제박물관 전시과장은 “무령왕은 급격한 제도 개편보다 종래의 제도 운용에 변화를 주어 혼란한 사회를 수습하고, 사회경제적 기반을 강화함으로써 안정된 사회질서를 구축했다”고 평했다.

민생 먼저 다지고 개방외교 펼쳐  

 무령왕은 탄탄한 내치를 바탕으로 주변국과의 교류에도 힘썼다. 중국 최강자인 양(梁)에 사신을 보내며 갱위강국(更爲强國·다시 강한 나라가 됨)을 선언했다. 521년 양나라로부터 ‘영동대장군’이란 2품 관작(官爵)을 받았다. ‘동쪽의 큰 장군’쯤 된다. 당시 고구려 안장왕은 한 품계 낮은 ‘영동장군’이었다. 513·516년에는 왜(倭)에 오경박사(경서에 능통한 학자)를 각각 파견하며 친선을 꾀했다.
 무령왕의 개방성은 유물에서도 확인된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무덤 자체를 벽돌 수만 장을 쌓아 만들었다. 당시 중국에서 통용된 오수전(五銖錢)을 왕비 묘지석에 올려놓은 것도 흥미롭다. 왕과 왕비의 목관은 일본산 금송으로 제작했다. 일본에서 미리 가공한 것으로 보인다. 한·중·일 3국의 어울림이다. ‘흙수저’ 무령왕이 금동신발을 신은 ‘금수저’ 무령왕으로 기억되는 배경이 아닐까 싶다.
 권오영 서울대 교수는 무령왕릉의 현재성을 이렇게 진단했다. “분단된 한반도 현실 속에서 주변국에 비해 작은 영토와 적은 인구를 가진 백제가 문화강국·지식대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원동력을 찾아볼 수 있다.” 대선 시즌이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사면초가에 놓인 2021 한국이 선택해야 할 ‘무령의 길’이 살짝 내비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