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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도망치다 구둣발로 짓밟히고…숨붙은 채 불태워진 왕비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52)

웨베르 보고서

러시아 공사 웨베르 보고서에는 고종의 증언이 담겨 있다. 현장 목격자 중에서 고종은 유일하게 살해범들의 이름을 거명했는데 황후를 살해한 자들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이들 외에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행동대는 20여 명이 더 있었으며 그들은 군인이 아니라 양복과 기모노를 입고 칼과 권총으로 무장한 일본 민간인이었다.

웨베르(베베르) 러시아 특명전권공사가 1903년 4월 작성한 '1898년 전후 한국에 대한 보고서' 일부. [자료 김영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웨베르(베베르) 러시아 특명전권공사가 1903년 4월 작성한 '1898년 전후 한국에 대한 보고서' 일부. [자료 김영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짐의 눈앞에서 일본인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전 조선 군부의 고문 스즈끼, 와타나베가 칼을 빼 들고 궁궐로 쳐들어 왔고 조선 군부대신 고문관을 지낸 오카모토와 스즈끼가 왕비를 잡으러 나갔다”고 진술하다 말고 실신했다고 웨베르는 보고서에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왕의 처소에 일본군 침입 사실을 알리러 달려간 이학균 연대장이 “왕후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자 고종은 “왕후는 지금 안전한 장소에 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말은 일본인들이 왕비를 잡겠다고 나간 뒤에도 고종은 명성황후가 무사한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시간 왕비의 처소 곤녕합에서는 이미 참담한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왕세자 이척의 증언은 일본인 흉한들이 왕비를 내동댕이치고 구둣발로 가슴을 세 번이나 내리 짓밟고 칼로 찔렀다고 했고, 영국 영사관 힐리어가 북경의 오코너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왕비는 뜰 아래로 뛰어나갔지만 붙잡혀 넘어뜨려 졌고, 살해범은 수차례 왕비의 가슴을 짓밟은 뒤에 칼로 거듭 왕비를 찔렀다고 했다. 영국인 힐리어의 보고서에는 왕비가 실외에서 변을 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왕비가 죽어 있는 것을 실내에서 보았다는 고바야캬와의 기록은 명성황후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그가 실내에 죽어있던 다른 궁녀를 왕비로 착각한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인들은 왕비가 있는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막자 칼로 두 팔을 베어 버렸다. 황후가 상궁 옷을 입고 상궁 무리 안에 섞여 있어 누가 황후인지 알아볼 수 없게 되자 일본인들은 한 명씩 끌어내 밖으로 떨어뜨렸다.

보고서에는 한 상궁의 중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왜인들이 왕비와 궁녀들이 있는 방으로 들이닥쳤다. ---- 일본군은 궁녀들을 밀치며 왕비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고, 우리는 입을 모아 여기에 왕비는 안계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왜인들은 (옥호루) 아래로 궁녀들을 집어 던졌다. 이때 왕비가 복도로 도망쳤고, 일본인들이 쫓아가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가슴을 세 번 짓밟고 칼로 가슴을 난자했다. 몇 분 후 시신을 소나무 숲으로 끌고 갔으며 얼마 후 그 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곤녕합 동행각 중간에 녹산(鹿山)으로 나가는 청휘문(淸輝門)이 있다. 일본인들은 명성황후의 시신을 녹산으로 옮기고 석유를 끼얹어 불태웠다. 당시 현장에 있던 일본인 에조가 쓴 ‘에조보고서’에는 녹산에서 시신을 불태울 때 황후의 생명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상황을 추측할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되어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에조보고서’란 명성황후 시해 사건 현장에 있던 일본인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의 보고서로 을미사변 직후 바로 작성되어 법제국 스에마쓰(末松) 장관에게 전달된 시해사건 기록이다. 1895년 당시 일본국 법제국 소속 참사관으로 조선  정부의 내부 고문이었던 에조가 본국 스에마쓰 장관 앞으로 보낸 외교문서로 ‘왕비(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진상을 보고’한 서간문이다. 에조는 당시 미우라 공사와는 다른 외교적 라인에 서 있었던 인물이라 이 사건을 아주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차마 글로 옮기기 어렵다’는 표현으로 인간으로서 그 참혹한 상황을 지켜본 감정을 말하고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명성황후가 칼에 베어져 숨진 뒤 그 시신이 불태워진 게 아니라,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불태워지면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왕비의 모습을 바라보며 인간적으로 복잡한 심경이었을 것을 암시하고 있다.

날이 밝은 후 궁궐을 순시하던 훈련대장 우범선(禹範善)은 녹원에서 타다 남은 유골을 발견하고, 이를 향원정 연못에 던지라고 명령했으나 훈련대 참위 윤석우(尹錫禹)가 황후의 시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를 수습해 멀리 떨어진 오운각(五雲閣. 지금의 청와대 대통령 관저 부근) 서봉(西峰) 밑에 매장했다. 나중에 명성황후의 장례를 치르려고 유해를 수습할 때, 뼈에 재와 모래가 뒤섞여 신체 부위가 판명되지 않아 고양군에 사는 환관을 불러 그의 말을 들으며 석회를 바르고 비단옷을 수십 벌 입혀 구부리고 포개고 묶어서 관에 넣었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2년 후인 1897년 11월 22일 한성부 동부 인창방(仁昌坊) 청량리(현 숭인원 자리)에 처음 장사 지내졌다. 그리고 고종 승하 후 1919년 3월 4일에 이장해 현재 위치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洪陵)에 고종과 함께 합장됐다. 일본으로 도피했던 우범선은 1903년 12월 본국에서 파견된 자객 고영근(高永根)에게 암살당했다.

독일 작센주의 라데보일에 있는 웨베르(베베르)와 그의 부인과 아들의 묘. [사진 Jbergner on Wikimedia Commons]

독일 작센주의 라데보일에 있는 웨베르(베베르)와 그의 부인과 아들의 묘. [사진 Jbergner on Wikimedia Commons]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웨베르보고서’를 직접 읽은 뒤 표지에 친필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단 말인가.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적은 뒤 즉각 한반도에 가까운 아무르주(州)에 군 비상대기령을 내렸을 정도로 당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보고서에는 사건 직후 10월9∼10일 제물포항에 정박해 있던 일본 군함과 선박 2척이 연이어 황급히 일본으로 떠났다는 자체 첩보에 따라 이 배가 시해범들을 실어 날랐을 것이며, 따라서 이것이야말로 일본 정부가 시해 사건에 개입한 증거라고 나름으로 결론을 내린 대목도 있다.

사건 직후 각국 공사 앞에서 사바틴의 증언은 영어·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어 각국에 발송되었다. 1895년 발행된 성 페테르부르그 신문, 루스코의 슬로보 신문, 모스콥스코의 베도 모스티 신문 등은 시해 현장에서 목격한 사바틴의 증언과 ‘워베르보고서’를 인용해 연일 이 사건에 깊은 연민을 표시하고 일제에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전쟁도 아닌 평화 시 군대를 동원해 궁궐을 습격하고 한나라의 국모를 서슴없이 시해한 사상 유례 없는 만행’이라고 이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참극이 벌어졌던 당일 오후 웨베르 공사의 제안으로 서울 주재 각국 외교관들이 새벽에 일어난 비극의 정황을 듣기 위해 일본 공사관에 모였다. 일본 공사 미우라, 서기관 스기무라와 웨베르 러시아공사, 알렌 미국 대리공사, 힐리어 영국공사, 크리인 독일영사, 르페브르 프랑스공사가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주한 외교관들은 궁궐에 난입해 왕비와 궁녀를 학살한 전대미문의 폭력사건에 일본의 책임이 있음을 따져 물었으나 미우라는 조선 순검과 군인의 다툼에 일본군이 출동했을 뿐 누구도 죽이거나 한 사실이 없다며 일본 정부의 관련성을 부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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