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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대통령 4번 바뀌었다…"남자도 총리 해?" 질문 낳은 '무티' [후후월드]

중앙일보

입력 2021.09.26 05:00

업데이트 2021.09.26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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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현지시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말로의 말로 새 공원에서 호주 앵무새들에게 먹이를 주며 웃음을 짓고 있다. [AP=연합뉴스]

23일(현지시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말로의 말로 새 공원에서 호주 앵무새들에게 먹이를 주며 웃음을 짓고 있다. [AP=연합뉴스]

"주말에는 채소밭 가꿔야 하는데…"

앙겔라 메르켈(67) 독일 총리가 지난 1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취임 후 '첫 통화'를 거절하며 보좌진에게 한 말이다. 지난 22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후에 처음으로 통화할 정상으로 메르켈 총리를 꼽고, 미국과 유럽의 관계 회복 시그널을 전 세계에 보내려 했다. 미국 대통령의 취임 후 전화 통화 순서를 각국이 주목하고 미국의 향후 외교 방향과 동맹국 위상 등을 가늠하는 잣대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르켈 총리는 베를린 근교의 집에서 밭을 가꾸고 호수를 걷기로 한 개인적 일정을 이유로 통화를 미뤘다. 보좌진들이 "다른 여러 정상과 먼저 통화가 이뤄질 수 있다"고 우려하자 "그런 상징은 (실제와) 관련이 없다"며 약속을 다시 잡으라고 지시했다 한다. 바이든 대통령의 첫 통화는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와 이뤄졌다.

앞으로도 이런 이유로 미국 대통령의 취임 후 첫 통화를 거절하는 성격의 지도자를 볼 수 있을까? 강직하고 따뜻한 성품으로 독일인에게 '무티'(mutti·어머니)라 불리며 존경받아온 메르켈 총리의 시대가 저문다. 26일(현지시간) 독일 총선이 시행되면 메르켈 총리는 장장 16년이라는 집권 기간을 마치고 자발적으로 권력에서 물러나는 첫 독일 총리가 된다. 다만 16년을 넘어 헬무트 콜 전 총리(2017년 사망)가 보유하고 있는 '최장수 총리 기록'(1982~1998년)을 경신할 가능성도 없진 않다. 새 총리 출범 후 연립정부 구성 시간이 길어지면 메르켈 총리의 ‘퇴장’이 늦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2006년 7월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할 당시의 모습. 슈트랄준트 시장 광장에서 청어통을 들고 앙겔라 메르켈 총리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2006년 7월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할 당시의 모습. 슈트랄준트 시장 광장에서 청어통을 들고 앙겔라 메르켈 총리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금 독일의 유·청소년에게 메르켈은 생애 기간 내내 총리였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독일 어린이들 사이에는 "남자도 총리를 할 수 있나요?"란 질문이 나온다고 한다. 2005년 집권 이후 미국에선 네 명의 대통령이 집권할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특히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는 매우 돈독한 관계였다. 오바마는 메르켈의 지지자로도 알려져 있다. 메르켈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자 다음 선거에 출마하지 않으려는 결심을 굳혔다가 오바마의 만류로 결심을 바꾼 것으로도 유명하다. 오바마는 2016년 미국 대선 후 작별인사차 베를린에 들렀을 때 메르켈에게 "서방진영과 세계를 단합하도록 이끌어 달라"고 촉구했다.

취임 기간 내내 '자유 진영의 수호자'(defender of the free world)로 불리며 국내외의 흠모 속에 총리직을 마치는 메르켈이지만, 그의 시대에도 명암은 공존한다. 워싱턴포스트(WP)는 메르켈이 '복잡한 유산'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부드러운 리더십이 또 한편에서 필요한 '대담한 리더십'의 결핍을 낳았다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2009년 G20 정상회의장에서 메르켈 총리와 만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자리를 이동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2009년 G20 정상회의장에서 메르켈 총리와 만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자리를 이동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낳은 총리

메르켈은 1954년생이다. 당시 서독에 속했던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지만 동독에서 자랐다. 갓난아기 때 루터교회 목사였던 아버지가 동독으로 발령 나면서였다. 그는 카를 마르크스대학(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고, 동독에서 양자물리학자로 삶을 꾸려갔다.

냉전이라는 시대적 영향을 깊숙이 받으면서 가슴 한편에선 서구 세계의 지도자가 될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사회주의자였던 메르켈의 아버지는 정치적 토론 모임을 가졌고 메르켈은 어린 시절 저녁 식탁 주위에서 격렬한 토론이 벌어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어린 나이였지만 동독 비밀경찰인 슈타지(Stasi)의 관심을 끌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자라면서 미국과 서구 사회를 갈망했다. 그는 은퇴 후엔 서독으로 다시 이주해 미국 전역을 여행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실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그는 첫 여행지로 미국 캘리포니아를 택했다.

36세에 정치에 입문한 메르켈 총리의 변천사. [AP통신]

36세에 정치에 입문한 메르켈 총리의 변천사. [AP통신]

메르켈의 정치 인생은 그가 서른다섯이던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시작됐다. 메르켈은 2019년 하버드대학 연설 도중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를 떠올리며 "한때 어두운 벽만 있던 곳에 갑자기 문이 열렸다"며 "나도 그 문을 통과할 순간이 왔다. 그때 나는 과학자라는 직업을 뒤로 하고 정치에 입문했다. 흥미롭고 마법 같은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메르켈은 이듬해인 1990년 독일 하원의원에 선출되며 '괴물 신인'으로 부상했다. 더구나 그가 입당한 당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이며 남성 중심적인 기독민주당(CDU)이었다. 당시 독일 총리는 헬무트 콜이었다. 콜의 눈에 든 메르켈은 다음 해 여성·청소년 장관으로 임명됐다. '콜의 아이(Kohl's girl)'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그의 정치 경력 초기는 콜의 영향력 속에 있었다.

자신을 키운 콜의 '살인자'가 되다

여성·청소년 장관이던 당시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콜 총리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보고하고 있다. [AP통신]

여성·청소년 장관이던 당시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콜 총리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보고하고 있다. [AP통신]

콜 내각에서 여성·청소년 장관, 환경부 장관을 거쳤고 2000년부터는 당 대표로 CDU를 이끌었다. 자신의 정치적 스승인 콜의 주위에서 부패 스캔들이 발생했을 때, 아무도 콜과 맞서지 않는 가운데 콜을 향해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놓기도 했다. 콜은 나중에 이때를 떠올리며 "내가 나의 살인자를 데려왔다"고 말했다. BBC는 "콜을 축출하고 당내 권력을 장악하는 무자비함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메르켈이 이끄는 CDU가 2005년 집권에 성공하면서 그의 총리 인생은 시작됐다. 메르켈이 취임한 후 경제 위기의 파고는 끊이지 않았다. 취임 당시 독일은 '유럽의 병자'로 불리고 실업률이 11%에 달했다. 이어 2008년에는 미국발(發) 금융위기, 2009년말 유로존 부채 위기, 2011년 이탈리아 재정위기가 연달아 닥쳤다.

"유로화가 실패하면 유럽도 실패한다"

지난 16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메르켈 총리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만찬을 가졌다. 마크롱 대통령은 은퇴를 앞둔 메르켈 총리와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말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6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메르켈 총리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만찬을 가졌다. 마크롱 대통령은 은퇴를 앞둔 메르켈 총리와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말했다. [로이터=연합뉴스]

당시 메르켈은 '대응이 느리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메르켈이 16년 동안 집권하게 한 그의 체제의 특징이 됐다. 위기 때마다 합의를 중시하는 특성이 두드러졌고, 한 번 정한 방향은 뚝심 있게 밀고 갔다. 메르켈 초대 내각에서 일했고 현재는 유럽연합(EU)의 수장인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은 2013년 인터뷰에서 "메르켈은 모두가 함께 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시간을 들였다"고 말했다.

메르켈은 유로존 부채 위기 당시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한 후 강력한 구조개혁과 긴축정책을 실시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그리스를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 메르켈을 히틀러에 비유하며 반대했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는 "유로화가 실패하면 유럽도 실패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메르켈이 겪은 가장 큰 정치적 위기는 2015년 시리아 내전을 피해 유럽의 문을 두드린 난민들을 대거 받아들이면서 찾아왔다.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그는 역사의 올바른 편에 서 있다"고 말했지만, 메르켈의 지지도는 타격을 입었다. 그의 난민 친화적 입장은 결과적으로 독일 내에서 극우가 득세하게 했고 유럽도 분열시켰다고 WP는 전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AP=연합뉴스]

앙겔라 메르켈 총리.[AP=연합뉴스]

지난해 발생한 코로나19라는 위기는 과학자인 메르켈을 돋보이게 했다. 팬데믹 초 각국이 우왕좌왕할 때 메르켈은 명확하고 솔직한 의사소통으로 사태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전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올해 초 백신 출시 이후 독일은 아스트라제네카(AZ) 접종과 관련해 네 차례나 권고를 바꿔 비판을 받았다. 메르켈 총리는 이에 관해 "권고를 바꿔 혼란을 주는 것과, (혈전) 사례가 발생했는데 무시하고,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 중 무엇이 백신에 대한 신뢰를 더 뒤흔들까요? 이런 상황에서는 솔직함과 투명성이 최고의 수단입니다"라고 말했다. 과학자들의 권고에 따라 솔직하게 권고를 바꿨다는 얘기다. WP는 대다수의 독일인은 전염병 기간 메르켈의 지도를 지지했다고 전했다.

"그는 노력했습니다(She tried)"

앙겔라 메르켈 총리.[AFP=연합뉴스]

앙겔라 메르켈 총리.[AFP=연합뉴스]

합의에 기반한 겸손한 정치 스타일에 박수를 보내는 이들도 있지만, 공격적인 러시아와 최근 부상하는 중국을 상대함에서는 대담한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동맹국과의 보조를 맞추는 데 미온적이라는 의미다. 분명한 태도를 취하라는 미국의 압박에도 메르켈은 "냉전을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메르켈은 또 기후 장관이라는 별명을 가졌을 만큼 기후 변화와 환경 문제에 발 벗고 나섰지만, 그가 퇴임하는 현재까지 독일은 갈탄(석탄의 한 종류) 최대 생산국이라는 아이러니를 극복하지 못했다.

메르켈은 자신의 정치적 유산에 대해 말하는 것을 거부해왔다. 그는 다만 2019년 슈트랄준트의 한 해안 마을을 방문했을 때 '50년 뒤 아이들이 역사책에서 당신에 대해 읽을 때 어떻게 쓰여 있으면 좋겠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노력했습니다(She tr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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