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길 쓸어놓으니 미친X 먼저 지나가더라

중앙선데이

입력 2021.09.25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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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5호 31면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에 ‘길 쓸어놓으니 미친X이 먼저 지나간다’는 게 있다. 저속하긴 해도 이처럼 명쾌하게 의미가 와 닿는 다른 문장을 찾기 어렵다.

예컨대 인터넷이 그렇다. 기껏 월드와이드웹 망을 구축해놨더니 제일 먼저 와서 전방(廛房) 문을 연 것은 포르노나 도박 사이트들이었다. PC 통신 시절부터 갈고 닦았던 노하우를 인터넷에 풀어놓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덜 성숙한 사람들의 주머니를 노렸다.

수상한 공익신고 청년 정치인
고개 든 청년정치 판 깰까 걱정
등 뒤의 전문가 살피지 않으면
무임승차 후 국정농단 반복돼

인터넷 기반이 스마트폰으로 옮겨가면서 뜬 SNS는 더욱 끔찍하다. 유익하고 건전한 소통의 장이 되리라는 기대는 진작에 무색해졌다. 알량하거나 과장된 심지어 거짓된 지식이나 정보로 혹세무민하는 난전(亂廛)이 됐다. 그 요란한 호객 소리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좀 더 성숙한 사람들마저 이리 긁히고 저리 쏠린다. 그럴 때마다 상처는 깊어지고 분노와 갈등 게이지가 치솟아 위험 경보 소리를 덮어버릴 정도다.

온라인 세상만 그런 게 아니다. 현실도 결코 덜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게 청년 정치다. 정치를 곧 ‘파워 게임’으로만 바라보는 구태를 바꿔보자고, 청년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독려해왔다. 그리고 30대 제1야당 대표가 탄생할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청년 정치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정치에 대한 청년들의 관심도 따라 커져가고 있는 마당에, 아뿔싸! 뭔 청년 ‘공익신고 호소인’이 다 쓸어놓은 길을 헤집고 지났다.

선데이칼럼 9/25

선데이칼럼 9/25

공익신고라면야 무에 나쁘겠나만, 그게 그렇게 순수하게 안 보이니 문제인 거다. 진보 진영에서 정치에 입문하더니 “진보로는 좋은 나라 못 만든다”며 보수 야당에 합류한 이였다. (정치경력 7년의 34세 청년 정치인이 거쳐온 정당만 8개지만 그것은 문제가 안 된다.) 그가 야당 합류 전 청년정당을 직접 만들어 대표가 됐는데, 당원 명부에 월남전 참전 사망자가 포함돼있다. 한 사람이 여러 번 서명한 흔적도 보인다. 창당 요건을 갖추지 못한 거짓 창당이라는 의혹이 나온다.

그런 사람이 올해만 몇 차례나 국정원장과 만났고, 폭로 기사가 나온 날짜가 “우리 원장님과 내가 원한 게 아니다”고 말한다면 어찌 순수해보일 수 있겠나. 청년이 한다고 청년 정치가 아니다. 그처럼 ‘비범한’ 한 청년 정치인의 미래는 궁금하지도 않다. 그저 가까스로 숨 죽었던 청년들의 정치 혐오가 더욱 커질까 두려울 따름이다.

가뜩이나 정치에 대한 무력감과 배신감이 팽배한 때 아닌가. 보수정권의 국정 농단에 분노한 시민들이 5개월 동안 생업을 포기하고 주말마다 전국을 촛불 바다로 만들고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을 탄핵·파면하며 깔아준 자락이었다. 그렇게 길을 쓸어놨더니 무임승차하듯 올라탄 정권이 자기들만 옳다는 오류와 오만에 빠져 무능과 위선의 국정 농단을 또 한차례 질펀하게 벌였다.

임기 내내 한 것은 번드르르한 말과 이미지 쇼뿐이었고, 이룬 것이라고는 서서히 권력의 시녀라는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공수처 하나에 불과하다. 그 결과 마스크 쓰라면 쓰고 백신 기다리라면 기다리는 말 잘 듣는 우리 국민이 맞닥뜨린 것은 천정부지 부동산 폭등과 더욱 가팔라진 고용 절벽, 억지로 멈춘 원전(그로 인한 누적 손실이 향후 30년간 1000조에 달할 것이라는) 그리고 매일매일 커지는 북핵 위협과 그것으로도 못 바꾼 ‘폭망’ 외교였다.

그야말로 “실천된 공약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밖에 없다”는 말이 더는 우스개가 아닌 현실이 됐다. 그것은 입만 살았던 진보 정치인들의 탓만은 아니다. 전문가들의 부역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영혼 없이 흐르는 물결 따라 떠내려가는 공무원들은 말할 가치도 없다.) 학문적 소신(만약 그런 게 있다면)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밥그릇, (결국은 그것 때문에) 자신이 속한 진영의 이익에만 종사해온 반쪽짜리 생계형 지식인들이 정치인들의 입맛에 맞춰 밀어붙인 결과인 것이다. 현실에서 불가피한 부작용을 뻔히 알면서 말이다.

권력자는 자신이 이런 전문가들을 부린다고 흔히 믿는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어떠한 사상이 정치와 사회에 스며드는 건 지식인들의 영향력에 의해서다.

“실무자들은 어떤 지적 영향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다고 믿지만, 대개 이미 세상을 떠난 경제학자의 노예들이다. 권좌의 광인들은 허공에서 소리를 듣는다고 하지만, 그들의 광기를 학술 저자들이 몇 년이 지난 글로써 걸러내고 있을 뿐이다.”

케인스가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에서 하고 있는 말이다. 권력자만 그런 게 아니다. 막 정치를 시작한 청년 정치인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경제와 정치철학의 영역에서 25세나 30세가 지난 후에 새로운 이론의 영향을 받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역시 케인스의 말이다.

정치인을 선택하기 위해 그의 뒤에 서 있는 전문가들을 살펴야 하는 이유다. 칼 포퍼의 경고가 도움이 된다. “지상의 천국을 약속하는 사람들은 지옥 말고는 어떤 것도 만들지 않는다.”

이들을 경계하지 않으면 우리가 쓸어놓은 길을 미친X들이 지나가는 걸 수없이 봐야 할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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