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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 입성 앞둔 마오 “무력 동원해 미 영사관 보호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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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5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95〉

중공 입성 후 일상을 되찾은 선양 거리. [사진 김명호]

중공 입성 후 일상을 되찾은 선양 거리. [사진 김명호]

국·공 양당이 손잡고 치르던 북벌 전쟁(1926-28) 시절, 난징(南京)에 입성한 북벌군이 사고를 쳤다. 외국 대사관에 총격을 가하고 외국인 주택에 난입했다. 기물 파괴는 물론, 폭행도 서슴지 않았다. 남자들은 수염이 뽑히고, 여자들도 부상자가 속출했다. 북벌군 지휘관들은 난감했다. 서방국가들이 윽박지르며 온갖 간섭 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평소 부하들에게 군벌과 서방 제국주의 타도를 외친 탓에 내부 수습에도 애를 먹었다.

국·공내전서 국민당 패색 짙어져

국·공내전(1946-49) 막바지, 승리를 확신한 마오쩌둥은 20여 년 전의 교훈을 잊지 않았다. 외국인 보호에 신경을 썼다. 1948년 10월 27일, 중공 동북야전군의 선양(瀋陽) 입성을 앞두고 ‘군사관제위원회(군관회)’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주임에 천윈(陳雲·진원), 부주임 겸 위수사령관에 우슈촨(伍修權·오수권), 시장에 전 하얼빈(哈爾賓) 시장 주치원(朱其文·주기문)을 임명하고 전문을 발송했다. “미국인의 금융과 상업활동을 허락해라. 무력을 동원해 미국 영사관을 보호해라. 국민당 잔여 세력과의 소통을 차단시켜라.”

미국은 국민당의 반격이 물건너가자 중공과의 관계 개선을 서둘렀다. 국무장관 애치슨이 선양 주재 미국 총영사 앵거스 워드에게 전문을 보냈다. “중공과 관계 건립을 요한다. 은밀히 군관회 지도자와 접촉할 방법을 모색해라.”

 선양에서 철수한 국민당군. 1948년 11월, 선양 교외. [사진 김명호]

선양에서 철수한 국민당군. 1948년 11월, 선양 교외. [사진 김명호]

10월 31일, 온종일 집무실에서 창밖을 응시하던 워드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날 밤 이런 일기를 남겼다. “근 2주간 불안과 공포를 떨쳐내기 힘들었다. 진저우(錦州)가 함락되고 창춘(長春)을 포위당한 국민당은 동북에서 완전히 실패했다. 국민당이 점거 중인 동북 최후의 대도시 선양도 중공의 수중에 들어갈 날이 눈앞에 다가왔다. 관리들은 가족 데리고 도망가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 중공은 미국과 장제스(蔣介石·장개석)를 한통속으로 취급한 지 오래다. 국무부는 1948년 초 국민당의 실패를 예견했음에도 영사관 철수를 고려하지 않았다. 동북에 외교기관을 잔류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반미교육 철저히 받은 중공 사병들이 국민당을 지지해온 미국 외교관을 어떻게 대할지, 무슨 모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중공이 무슨 합리적인 변덕을 부릴지, 예측하기 힘들다.” 이틀 후에 벌어질 미국 대통령 선거도 언급했다. “트루먼에게 실망한 장제스는 뒤로 듀이를 지원했다. 듀이가 당선된다 해도 중국 내전의 전세가 역전될 가능성은 없다.”

11월 1일 동틀 무렵, 선양 시내에 총성이 콩 볶듯 했다. 떼를 지어 도망가는 국민당 병사들의 초라한 모습이 시민들을 불안케 했다. 미리 준비해둔 백기를 내건 주택과 상점이 의외로 많았다. 이튿날 오전, 일본이 남기고 간 다허(大和·야마토)여관에서 첫 번째 군관회 회의가 열렸다. “질서 회복을 호소하고, 내외국인의 사유재산과 인신의 안전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포고문 발표에 합의했다. 거리, 골목 할 것 없이 군복 입은 선전원들이 포고문 붙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틀 만에 거리에 인파가 넘쳤다. 워드는 시험 삼아 영사관을 나왔다. 처자와 함께 사저까지 산책했다. 아무 문제가 없자 군관회와 접촉을 시도했다.

당시 선양에는 미국 외에 영국, 프랑스 영사관과 소련 무역대표단이 있었다. 주치원의 시장 취임을 통보받은 4개국 대표들의 전화통에 불이 났다. 재임 기간이 가장 긴 워드에게 신임 시장을 방문하자고 재촉했다. 11월 3일 워드가 인편으로 주에게 편지를 보냈다. “영전을 축하한다. 불원간 만나 친밀한 관계 맺기를 희망한다.” 군관회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천윈이 주에게 당부했다. “트루먼이 듀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우리에겐 좋은 징조다. 말을 적게 하고 듣기만 해라. 웃음을 잃지 말고 외국인 보호에 힘쓰겠다는 말만 되풀이해라. 차량 통행증과 중요한 외국인 주택에 초병(哨兵) 세우겠다는 말 잊지 마라. 소련 무역대표는 승용차가 없다. 다른 영사들과 차별화할 필요가 있다. 돌아갈 때 차량을 선물해라.” 주는 시키는 대로 했다.

중공 간부들, 선양 시장 발언 질타

사저에서 무료한 시간 보내는 선양 총영사 워드. [사진 김명호]

사저에서 무료한 시간 보내는 선양 총영사 워드. [사진 김명호]

3일 후, 주치원이 통역 두 명 데리고 미국영사관을 답방했다. 워드는 미국의 공업과 과학서적 보여주며 주를 홀렸다. 주가 관심을 표명하자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미국은 중국 영토에 야심이 없다. 상업과 기술을 통해 동북의 발전에 기여하기를 바랄 뿐이다.” 주도 무릎을 치며 동의했다. “나는 미국 상인들이 동북에서 무역활동 회복하기를 희망한다”며 큰소리쳤다. 미국과 통신도 즉석에서 허락했다.

군관회 주임 천윈은 치밀했다. 그날 밤 통역 두 명을 각자 불러 주치원과 워드의 대화 내용을 확인했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회의를 소집해 젊은 시장을 질책했다. “외사(外事)업무는 언다필실(言多必失), 말이 많으면 반드시 실수한다. 불필요한 말을 많이 했다. 동북과 미국의 무전은 소련을 거쳐야 한다. 소련의 오해를 사고도 남을 발언을 했다.” 위수사령부 정치위원 타오주(陶鑄·도주)는 성질이 불같았다. 주가 “별생각 없이 외교 예의상 어쩔 수 없었다”고 우물거리자 물컵 집어 던지며 고함을 쳤다. “미국 외교관들은 본업이 제국주의자다. 일반인처럼 대했다간 무슨 대가를 치를지 모른다. 우리는 아직 외교관이 없다. 앞으로 외교 타령 하려면 외교가 뭔지 제대로 배워라.” 이날 타오주의 비판은 주치원에겐 보약이었다. 각고의 노력으로 외교계에 입신해 불가리아와 베트남 대사 역임하며 타오주가 내 스승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이튿날 천윈은 우슈촨, 타오주와 연명으로 당 중앙에 자아 비판서를 전송했다. 전선에 있는 동북야전군 사령관 린뱌오(林彪·임표)에겐 군관회 토론 결과를 전화로 보고했다. “외국인과는 가급적 만남을 피한다. 외국 영사관원들의 법적 지위는 당분간 유보한다. 외국영사관의 질문은 가급적 묵살한다. 회답을 해도 짧게 한다. 선양시 시장은 외교 문제에서 배제시킨다. 이미 발부한 차량통행증은 회수한다.” 린뱌오의 관심은 엉뚱한 곳에 있었다. “미국영사관에 무선통신시설이 있는지 확인해라. 있으면 간첩질했다는 증거다.” 주치원 문제는 화를 냈다. “학생 시절 길바닥에서 반제운동(反帝運動) 시위나 하던 철부지라 어쩔 수 없다. 피아노 못 치는 놈이 건반을 멋대로 쳐댔다. 외국인 만나지 말고 서신으로 대신하라고 일러라. 모르는 건 회답할 필요 없다.”

다시 회의를 소집한 천윈은 미국영사관 수색을 토론에 부쳤다. 중공과 미국의 관계가 살벌해지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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