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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 속에 솟은 순백의 연잎…“여기까지 오는데 40년 걸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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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5호 18면

옻칠 장인 전용복과 사진가 김용호의 협업 

칠예가 전용복(왼쪽)씨와 사진가 김용호씨가 협업한 ‘옻칠 실크 스크린’ 작품. 세로 2m, 가로 7m, 블랙 & 화이트로 제작된 작품은 김씨의 연(蓮) 사진 ‘피안’을 망점 형판으로 옮긴 후, 전씨가 옻칠로 금속판에 프린트 한 것이다. 김경빈 기자

칠예가 전용복(왼쪽)씨와 사진가 김용호씨가 협업한 ‘옻칠 실크 스크린’ 작품. 세로 2m, 가로 7m, 블랙 & 화이트로 제작된 작품은 김씨의 연(蓮) 사진 ‘피안’을 망점 형판으로 옮긴 후, 전씨가 옻칠로 금속판에 프린트 한 것이다. 김경빈 기자

‘칠흑 같은 어둠’이라는 표현이 있다. 여기서 칠흑은 ‘옻칠처럼 검고 광택이 있다’는 뜻이다. 서울 인사동 갤러리 라메르에서 24일 시작된 ‘전용복 칠예전-옻칠의 향연’에 가면 바로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순백의 연잎들이 구름처럼 솟아오르는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 칠예가 전용복(70)씨와 사진가 김용호(65)씨가 협업한 옻칠 실크 스크린 작품이다. 김 사진가가 찍은 연(蓮) 시리즈 ‘피안(彼岸)’을 데이터로 분석해 첨예한 망 형판을 만들고, 전 칠예가가 옻을 투과시켜 금속판에 프린트한 작품이다.

전 칠예가는 “여기까지 오는데 40년이 걸렸다”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그의 이런 벅찬 자부심에는 이유가 있다. ‘옻칠 실크 스크린’ 자체가 전 세계 최초로 선보이는 장르다. 보통의 잉크로 실크 스크린을 하는 건 쉽지만, 안료까지 섞어 색을 낸 옻으로는 작업이 쉽지 않다. 망을 투과한 옻이 금방 굳어버리기 때문이다. 전 칠예가는 “옻칠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았다”며 “김 작가의 아름다운 연 사진에 반하지 않았다면 거듭된 실패를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김 사진가는 “옻칠을 통해 사진의 다양성이 확장됐다”며 “옻칠은 1만년을 견딘다는데, 만약 1만 년 후 인류가 멸망한다면 지구에 남은 유일한 유물이 전용복과 김용호의 협업 작품들일 것”이라고 미소를 지었다.

물속에서 연잎을 바라본 독특한 시각의 사진 시리즈 ‘피안’. [사진 김용호]

물속에서 연잎을 바라본 독특한 시각의 사진 시리즈 ‘피안’. [사진 김용호]

옻칠 얼룩으로 뒤덮인 캐주얼 셔츠·청바지·모자 차림의 옻쟁이, 체크무늬 바지·라피아 소재 중절모·흰색 플립 플랍(‘쪼리’라 불리는 신발)을 차려입은 멋쟁이. 나이도, 분야도, 스타일도 다른 두 사람이 만난 건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덕분이다. “어둠의 바닥에서 찾아낸 천 년의 빛”이라며 전 칠예가의 나전칠예 작품을 아꼈던 이 전 장관은 최근 김 사진가와 함께 인물 사진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전 장관의 추천으로 김 사진가의 전시에서 ‘피안’ 시리즈를 본 전 칠예가는 “이거다!”하고 무릎을 쳤다. 이번 전시에 김 사진가가 찍고, 전 칠예가가 옻칠 실크 스크린을 한 이 전 장관의 인물 사진이 걸린 이유다.

일본 ‘세계 최고의 칠예가’ 찬사

전용복 칠예가의 나전칠예 작품 ‘봄이 오는 소리’, 세이코와 협업한 시계. 이 시계는 개당 8억원에 판매됐다.

전용복 칠예가의 나전칠예 작품 ‘봄이 오는 소리’, 세이코와 협업한 시계. 이 시계는 개당 8억원에 판매됐다.

한국 전쟁 직후 부산 피난민 판자촌에서 태어난 전 칠예가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야간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목재 회사에 취직했다. 웬만한 부잣집이면 자개농 한 세트는 들여놓던 시절. 그는 그곳에서 운명처럼 옻칠을 처음 접했다. 당시 가구들에는 쉽게 마르고 가격은 싼 인공 옻 ‘카슈’를 썼는데, 그는 ‘진짜 우리 옻’에 호기심이 생겼다.

삼국시대부터 조선까지 우리 전통 칠예를 공부하던 그에게 운명처럼 또 다른 인연이 찾아왔다. 일본 도쿄 메구로가에 있는 국보급 연회장 ‘가조엔’이다. 일본이 역사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가조엔은 건물 내외부 전체를 5000점의 나전과 옻칠 작품으로 장식한 곳이다. 1930년대 건축됐고 80년대 후반 무렵 낡아서 ‘철거 vs 복원’ 논란에 휩싸였다.

전용복 칠예가의 나전칠예 작품 ‘봄이 오는 소리’, 세이코와 협업한 시계. 이 시계는 개당 8억원에 판매됐다.

전용복 칠예가의 나전칠예 작품 ‘봄이 오는 소리’, 세이코와 협업한 시계. 이 시계는 개당 8억원에 판매됐다.

당시 우연히 가조엔의 옻칠 밥상 하나를 수리했던 전 칠예가는 ‘만약 내가 이 복원 작업을 맡는다면’이라는 꿈을 갖고 혼자서 준비를 시작한다. 부산성심외국어대 일문과에 입학해 일어를 공부하고, 틈틈이 일본 전역을 돌았다. “일본은 지역마다 옻칠 기법과 개성이 다 틀려요. 직접 둘러보고 기술자들을 찾아다니며 공부를 했죠.”

88년 일본 옻칠장인 3000명이 입찰한 가조엔 복원 작업을 마침내 그가 따냈다. 당시 돈 1조원의 경비가 소요되는 대형 프로젝트의 감독으로 임명된 것이다. 3년의 세월 끝에 복원을 마친 가조엔이 재오픈하자 일본 언론은 그에게 ‘세계 최고의 칠예가’라는 찬사를 보냈다. 이후 끊임없이 밀려드는 일본 옻칠계의 요청으로 24년간 일본에서 지내며 작업했던 그는 10년 전 “내 뿌리인 고향”으로 귀국했다.

“가조엔 작업을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한국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조엔의 나전과 옻칠 작품의 8할이 고려와 조선의 기법이었거든요. 실제로 1930년대 가조엔 건축 시 한국의 많은 옻칠장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작업했고요.”

그의 작업이 국내외에서 꾸준히 호평받는 이유는 전통에 머물지 않고 동시대 문화와 호흡하기 때문이다. 전복을 잘게 부숴 문양을 내는 ‘타찰법’, 자개를 실처럼 가늘게 잘라 사용하는 ‘끊음법’, 금속 위에 옻칠을 고정하는 ‘금태법’ 등 그가 구사하는 기술은 모두 전통 기법이지만 구현되는 작품은 온전히 새롭게 창작된 현대 예술품들이다. 그의 작품 중에는 심지어 엘리베이터 문과 시계도 있다. “전통도 꾸준히 변화하며 미래세대에 물려줄 21세기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배우 배용준·김혜수의 옻칠 선생이기도 한 그는 현재 뉴욕 맨해튼에 자신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는 갤러리 오픈을 앞두고 있다. 코로나가 잦아들면 그곳에서 서양 예술가들에게 옻칠 아카데미도 열 예정이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사진가

전용복·김용호 두 작가가 협업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초상.

전용복·김용호 두 작가가 협업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초상.

현대카드, 현대자동차, KT, 패션지 보그 등과 작업하며 화제작을 다수 남긴 김용호 사진가는 대한민국 광고·패션사진계의 대가다.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건 지루하다”는 그는 독특한 감각과 아이디어로 사진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도 자신만의 창작세계를 구축해왔다. 아트 토이 ‘모던보이’를 만들어 2013년 서울역 역사에서 설치 조형전을 가졌는가 하면, 카페 ‘플로라’를 열고 청담동 카페 문화를 선도했다. 윤여정·고현정 등이 실명으로 출연한 영화 ‘여배우’에선 배우로도 열연했다.

10년 전 시작한 사진 시리즈 ‘피안’은 물 바깥이 아닌 물속에서 연잎을 바라본 작업이다. “10년 전 ‘조선민화전’을 감상하다가 부처와 군자, 사랑과 고귀함 등을 상징하는 연을 탐닉하게 됐죠.”

물속에서 바라보는 연은 어떨까. 그의 상상력을 도운 건 얼떨결에 구매한 잠수복이었다. 그는 50대에 ‘내셔널지오 그래픽 국내 다이버 1호’로 유명세를 탔다. 수중 촬영에 호기심이 발동한 그가 모집 공고를 보고 신청할 때만 해도 두 번째 응모자였는데, 필리핀에서 진행된 실제 교육에는 그 혼자 참가했던 것. “경비도 비쌌고, 긴 일정을 뺄 수 없어서 첫 번째 응모자와 다른 이들은 참가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나 혼자서 다섯 명의 국내외 전문 다이버들에게 ‘황제 교육’을 받았죠.”(웃음) 하지만 수중에서 극심한 패닉상태를 경험한 후 그의 잠수복은 창고에 처박혔다. “물속에서 걷다가 연 가시에 상처를 입으면서 창고 속 잠수복을 다시 꺼내게 됐죠.”

세속으로부터 초월한다는 뜻의 ‘피안’은 그의 모든 창작 활동을 관통해온 화두인 장자의 ‘호접몽’에서 비롯됐다. 장자가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던 꿈을 꾼 후 ‘인간인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걸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인간인 나로 변해 있는 것일까’ 물아일체의 경지를 깨달았다는 고사 말이다. 김 사진가는 호접몽을 통해 ‘다르게 보기’의 단초를 발견했다고 한다. “한여름에 잠수복 입고 푹푹 박히는 뻘밭을 걷다가 맘에 드는 풍경을 보면 물에 눕죠. 시원한 물과 바람의 감촉이 나를 감싸는 순간, 지금까지 알던 세상과 전혀 다른 풍경과 조우하게 되죠. 그때마다 ‘꿈 같은 세상을 보고 있는 나,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나’를 상상합니다. 잠시라도 다른 세상의 내가 될 수 있다면 그곳이 피안의 세계겠죠.” 이번 전시에선 그의 미발표작 ‘매화’ 시리즈도 볼 수 있다.

갤러리 라메르 전시에는 두 사람의 협업 작품 10여점 외에도 전 칠예가의 크고 작은 나전칠예 작품 50여점이 전시됐다. 10월 4일까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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