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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경종 죽였나" 영조 멘탈 붕괴시킨 게장 독살설의 진실 [역발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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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왕인 영조와의 갈등 끝에 비극적으로 숨진 사도세자 얘기를 다룬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사진 쇼박스]

부왕인 영조와의 갈등 끝에 비극적으로 숨진 사도세자 얘기를 다룬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사진 쇼박스]

"25년이나 지났는데 지겹지도 않냐."
영화 '사도'의 한 장면. "경종 대왕을 독살한 당신이 어떻게 왕이란 말이오?"라고 외치는 죄인에게 영조는 이렇게 내뱉습니다. 그러고는 귀를 씻어버리죠.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에 따르면 영조는 좋지 않은 말을 들으면 반드시 귀를 씻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게장과 감 먹고 5일 만에 사망 #사망 배후는 이복동생 영조? #경종은 정말 성불구자였나?

이것은 아마도 '나주 궤서사건'이 모티브였던 것 같습니다. 영조 31년(1755) 1월 전라도 나주에서 영조를 비방하는 익명의 글이 나주에 붙었던 사건입니다. 조선 시대에 이런 글을 괘서(掛書)라고 불렀습니다. 나주 괘서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조가 직접 나선 국문 과정을 보면 유추가 가능합니다.

“신치운이 말하기를, ‘신(臣)은 갑진년 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逆心)’이라고 하니, 임금이 분통하여 눈물을 흘리고,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들도 모두 마음이 떨리고 통분해서 곧바로 손으로 그의 살을 짓이기고자 하였다.” (영조실록 31년 5월 20일)

여기서 영조의 멘탈을 붕괴시킨 건 게장입니다. 대관절 게장이 뭐길래 영조는 분통하여 눈물까지 흘리며 격렬하게 반응했을까요.

KBS 드라마 '징비록'의 한 장면 [사진 KBS]

KBS 드라마 '징비록'의 한 장면 [사진 KBS]

경종은 게장을 먹고 죽었다?
신치운이 말한 갑진년은 1724년. 경종이 사망한 해입니다. 이해 8월 경종은 한 달을 앓다가 사망합니다. 34세. 왕위에 오른지 4년째였습니다. 그런데 신치운의 말 속엔 뼈가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경종은 8월 20일 먹은 생감과 게장을 먹고 극심한 복통과 설사에 시달렸고 결국 닷새를 버티지 못했습니다.

"임금의 복통과 설사가 더욱 심하여 약방에서 입진(入診)하고 황금탕(黃芩湯)을 지어 올렸다." (『경종실록』 4년 8월 22일)
"임금의 설사의 징후가 그치지 않아 혼미하고 피곤함이 특별히 심하니, 탕약을 정지하고 잇따라 인삼속미음(人蔘粟米飮) 을 올렸다." (『경종실록』 4년 8월 23일)

게장과 생감을 들인 것은 당시에도 지적이 나왔습니다.
"여러 의원들이 임금에게 어제 게장을 진어하고 이어서 생감을 진어한 것은 의가(醫家)에서 매우 꺼려하는 것이라 하여…" (『경종실록』 4년 8월 21일)

간장게장. [중앙포토]

간장게장. [중앙포토]

한의학에서는 게장과 감을 같이 먹으면 곤란하다고 봅니다. 모두 차가운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병이 있거나 소화기 계통이 약한 사람은 큰 탈이 날 수 있다는 것이죠.
경종은 허약체질이었고 당시엔 한 달여간 제대로 식사를 못했기 때문에 심신이 피폐한 때였습니다. 그랬기에 게장과 생감을 올린 것은 사실상 '독약'을 보낸 셈이라는 것이죠. 지금까지 누가 보낸 것인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당시에 경종 주변에서 '범인'으로 지목된 것이 바로 경종의 이복동생 연잉군(훗날 영조)였습니다.

게장을 올린 범인은 영조? 
물론 영조는 '가짜 뉴스'라며 펄쩍 뛰었습니다. 신치운을 국문하고 5개월 가량 지나 영조는 이렇게 억울함을 토로했습니다.
"신치운을 사형에 처한 뒤에 울며 우리 자성(慈聖·숙종의 세번째 부인 인원왕후 김씨를 가리킴)께 아뢰었는데, 자성의 하교를 듣고서야 그때 게장을 어주(御廚·수랏간)에서 공진(供進)한 것임을 알았다. 흉악하고 은혜를 저버린 무리가 고의로 사실을 숨기고 바꾸어 조작하여 말이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까지 핍박하였다." (『영조실록』 31년 10월 9일)

게장을 올린 것은 자신이 아니라 수랏간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경종 독살설'은 오랫동안 이어지며 영조를 힘들게 했습니다. 게장 외에 비상 같은 독약을 음식에 넣었을 것이라는 풍문도 돌았습니다.

충남 아산 온양온천 전통시장에서 온궁 수라상을 차리는 이색 전통행사. [ 김성태 프리랜서 ]

충남 아산 온양온천 전통시장에서 온궁 수라상을 차리는 이색 전통행사. [ 김성태 프리랜서 ]

영조 4년(1728)에 벌어진 이인좌의 난도 '영조가 경종 독살범'이라는 구호를 반란의 명분으로 내세웠습니다. 당시 이인좌 세력은 군대 안에 경종의 위패를 설치하고 조석으로 곡을 하며 민심을 흔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이인좌의 난은 진압됐지만, 독살설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영조 31년 나주 궤서사건의 배후를 잡아낸 영조는 '토역 정시(討逆庭試)'라는 특별 과거시험을 엽니다.

"임금이 바야흐로 친림하여 시사(試士)하는데 한 시권(試券)이 처음에는 과부(科賦)를 짓는 것처럼 하다가 그 아래 몇 폭(幅)에다가는 파리 머리만한 작은 글씨를 썼는데 모두 난언 패설(亂言悖說)이었다…임금이 다 보지 못하고 상을 치면서 눈물을 흘리니…여러 신하들이 유시를 받들고서야 아주 패악하고 흉한 말이 있음을 알고 모두 분통하여 죽고자 하였는데…" (『영조실록』31년 5월 2일)

난언 패설, 또 독살설이 튀어나온 것이죠. 독살설의 괴수를 잡은 것을 축하하며 연 과거 시험의 답안지에 독살설이 나오니 영조로서는 팔짝 뛸 일이었습니다. 이후 영조는 자신을 둘러싼 소문을 조목조목 반박하는『천의소감(闡義昭鑑)』이라는 책을 따로 내기까지 했습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 답안지 [중앙포토]

조선시대 과거시험 답안지 [중앙포토]

영조는 정말 억울했을까요. 독살설에 대해 전문가들은 근거가 약하다고 보는 편입니다.
『한국의사학회지』에 발표된 논문(「경종독살설 연구」)은 경종이 한 달 가량 더위에 지치고 식사를 못해 기력이 없던 상황에서 차가운 성질의 음식인 게장과 생감을 먹고는 끊임없는 설사를 하다가 극심한 탈수로 죽었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왕의 한의학』의 저자인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은 "스트레스와 간질에다 비만성 질환까지 달고 살았으니 게장과 감이 치명타를 줄 정도로 허약한 상태가 됐을 것"이라고 봤습니다.

게장이 올려진 것에 대해선 의견이 나뉩니다. 의도가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수랏간에서 그런 의학적 지식까지 고려하지는 않았을 거란 견해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경종이 한 달간 밥상을 물렸기 때문에 게장을 반드시 먹는다는 보장도 없었다는 것이죠.

경종은 성불구였나?
"이 날 희빈 장씨가 어린 세자의 국부를 잡았던 탓으로 후일 세자에게는 후사가 없었다는 것이며, 또한 세자는 이 때의 일로 단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진위는 확인할 수 없다." (2002년 KBS '장희빈' 中)

KBS '장희빈'의 한 장면 [사진 KBS]

KBS '장희빈'의 한 장면 [사진 KBS]

야사에 전해지는 유명한 내용이죠. 장씨의 행동은 확인되지 않지만 경종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세자 시절 "원자(元子·경종)에게 경휵(驚搐·놀라고 두려워함) 의 증세가 있어…" (『숙종실록』 15년 11월 8일)는 기록도 있고 스스로도 “내가 ‘이상한 병’이 있어 10여 년 이래로 조금도 회복될 기약이 없다.”(『경종실록』 1년 10월 10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 그는 후사가 없었는데, 후궁을 두지 않았던 유일한 조선의 국왕이기도 합니다. 부인의 문제였다면 후궁을 권하고 들였겠지만 당시 궁 내에선 문제가 경종에게 있다는 것을 모두 알았던 것이죠.

경종의 건강 악화는 복합적 요인으로 보입니다. 희빈 장씨의 비극적 죽음, 세자로서 대리청정 3년, 자신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치열한 당파싸움 등이 큰 스트레스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사진제공=문화재청]

조선왕조실록 [사진제공=문화재청]

“상이 동궁에 있을 때부터 쌓인 걱정과 두려움으로 마침내 형용하기 어려운 질병을 앓았다. 해가 지날수록 고질이 됐으며 더운 열기가 위로 올라와서 때로는 혼미한 증상도 있었다.”(『경종실록』 4년 8월 2일)는 기록도 있습니다.

다만 만화나 드라마에서 비실비실한 체형으로 나오는 것과 달리 실제로는 비만이었습니다. 『승정원일기』에는 경종에 대해 ‘비만태조(肥滿太早·아주 일찍부터 살이 찌다)’, ‘성체비만(成體肥滿·다 커서도 살이 쪘다)’ 등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덥고 습한 날씨에 무척 힘들어했다고도 합니다.

현재 권력 vs 미래 권력
경종와 영조는 이복 형제였습니다. 경종의 모친은 희빈 장씨, 영조의 모친은 숙빈 최씨입니다. 숙빈 최씨는 훗날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해치려 한다고 숙종에게 알려 사약을 받게 한 인물입니다. 두 사람의 생모는 서로 원수지간이었던 것이죠.
양측을 지지하는 당파도 달랐습니다. 경종은 소론이, 영조는 노론이 각각 지지했습니다. 모두 서인입니다. 희빈 장씨를 지지했던 남인은 정치적으로 몰락한 상태였습니다.

외가와 정치기반을 모두 잃은 경종의 왕권은 취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론이 새로운 지지기반이 되어줬지만, 당시 정치사회의 권력은  노론으로 넘어간 상황이었습니다. 즉, 소론은 소수여당이었고, 그 외부를 거대 야당인 노론이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죠. 후사를 두지 못한 경종이 입양을 고민했지만, 동생 연잉군(영조)을 세자로 지명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입니다.

그러니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인 경종과 영조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이 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살설이 자라기 좋은 토양이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영국 헨리8세의 두 딸이자 이복 자매였던 메리 여왕(가톨릭)과 엘리자베스 여왕(성공회)의 관계 같았을 것입니다.

영국 메리 여왕의 초상화. 1554년 그려진 것으로 ‘라 페르그리나(La Peregrina)’로 알려진 진주가 펜던트로 된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커먼(퍼블릭 도메인)]

영국 메리 여왕의 초상화. 1554년 그려진 것으로 ‘라 페르그리나(La Peregrina)’로 알려진 진주가 펜던트로 된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커먼(퍼블릭 도메인)]

하지만 엘리자베스를 핍박했던 메리와 달리 경종은 동생을 무척 아꼈습니다.
경종 1~2년(1721~1722) 반역 모의를 벌였다는 밀고로 노론은 풍비박산이 납니다. 이 사건으로 김창집·이이명 등 이른바 '노론의 4대신'이 모두 처형되고 관련자 200여명이 처벌받는 등 노론 대숙청이 벌어집니다.
소론 강경파는 연잉군도 처벌하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경종은 이를 제지하고 동생을 끝까지 보호했습니다. 연잉군 역시 훗날 왕위에 올랐을 때 형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을 여러차례 토로했습니다.

"황형(皇兄·경종)의 지극한 우애와 지극히 인자함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찌 오늘이 있었겠는가? 내가 68세에 이르게 된 것도 다 우리 황형께서 주신 것이다." (『영조실록』 37년 8월 8일)

"황형의 병세가 위독하였을 때 나를 위하여 문을 열고 시원한 공기가 들어오게 하라고 하신 자상하신 뜻을 생각하면,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 비록 찌는 듯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다시 어떻게 문을 열라는 하교를 듣겠는가? 생각의 일어남이 여기에 미치니, 눈물과 콧물이 얼굴을 덮는다. (『영조실록』 23년 6월 28일)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사진 뉴프로덕션]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사진 뉴프로덕션]

정치적 풍파 속에서 때로는 갈등하기도 했지만, 서로에 대한 끈끈한 정은 놓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경종의 치세 기간(4년)은 꽤 짧았습니다. 그를 전후해 즉위한 숙종(45년)과 영조(52년)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어쩌면 온전치 못한 자신의 상태를 감안해 두 시기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기꺼이 맡았는지도 모릅니다. 경종과 영조의 애증을 다룬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에서 경종은 연잉군이 가져온 인삼차에 독이 든 것을 알고도 마십니다. 동생을 보호하면서 다음 시대를 맡기는 것이죠.

숙종이 남긴 유산
사극에서 숙종은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 그리고 숙빈 최씨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며 정치를 혼란케 만든 국왕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하지만 숙종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정치적 달인으로 꼽힙니다. 그가 왕위에 오를 무렵 '예송논쟁'을 마친 조선의 붕당 정치는 극에 달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숙종은 '환국'이라는 극단적인 정치 이벤트를 통해 주도권을 놓지 않았습니다.

KBS 드라마 '장희빈'의 한 장면 [사진 KBS]

KBS 드라마 '장희빈'의 한 장면 [사진 KBS]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를 왕후로 올리고 내릴 때마다 서인(인현왕후 측)과 남인(희빈 장씨 측)을 번갈아 숙청하면서 특정 붕당이 권력을 갖지 못하게 막은 것이죠. 사실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숙빈 최씨는 그저 환국이라는 장기판에 쓰는 '말'에 불과했습니다. 덕분에 숙종은 강력한 왕권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후유증도 컸습니다.

환국이 벌어질 때마다 패배자에겐 처절한 보복이 이어졌습니다. 오죽하면 경신환국 때 남인에 대한 처분을 놓고 서인 내부에서 강경파(노론)와 온건파(소론)로 나뉘었을까요. 그러니 서로 '정권을 내주면 죽는다'는 의식이 자리잡게 됐습니다.
환국 정치가 남긴 깊은 불신과 대립은 숙종의 자손들에게도 큰 상처를 안겼습니다. 경종과 영조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그랬고,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 갈라진 부당(父黨·노론)과 자당(子黨·소론), 정조 시대에 시파와 벽파가 그랬습니다. 결국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굶어죽는 비극까지 벌어졌습니다.

사도세자는 노론 내부의 부홍파(扶洪派)와 공홍파(攻洪派) 사이에 벌어진 권력다툼 과정에 휘말렸다. 공홍파는 사도세자를 공격해 당시 권력의 정점인 혜경궁 홍씨 집안을 끌어내리려고 했다. 영화 ‘사도’에서 영조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확인하는 장면. [사진 쇼박스]

사도세자는 노론 내부의 부홍파(扶洪派)와 공홍파(攻洪派) 사이에 벌어진 권력다툼 과정에 휘말렸다. 공홍파는 사도세자를 공격해 당시 권력의 정점인 혜경궁 홍씨 집안을 끌어내리려고 했다. 영화 ‘사도’에서 영조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확인하는 장면. [사진 쇼박스]

당초 숙종은 붕당 간의 대립을 부추겨 왕권을 지키려 했지만, 종국에는 왕가 전체가 붕당에 휘말리면서 나라가 흔들리게 된 것입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떨까요. '팬덤'을 이용하던 정치권은 이제 '빠'들의 눈치를 보는 처지가 됐습니다. 강성 지지층에 끌려다니며 정치보복과 일방독주를 하는 정치권이 '제물'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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