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김성탁의 시선

"감사하다"고 답하지 않아도 돼요

중앙일보

입력 2021.09.24 00:33

업데이트 2021.09.24 02:14

지면보기

종합 28면

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SNL 코리아 리부트' 프로그램에서 인턴기자(왼쪽)와 앵커가 등장하는 코너. [사진 쿠팡플레이]

'SNL 코리아 리부트' 프로그램에서 인턴기자(왼쪽)와 앵커가 등장하는 코너. [사진 쿠팡플레이]

 “젊은 패기로 신속·정확한 뉴스를 전달한다, 안녕하세요. 인턴기자 주현영입니다.” 최근 예능 프로그램 ‘SNL코리아’에서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는 한 코너가 큰 화제를 낳았다. 이병헌 등 인기 배우가 나온 코너보다 ‘주현영 기자’가 SNS를 달구길래 영상을 찾아봤다. 웃음보를 터뜨려주는 줄 알았는데 다소 낯선 느낌이었다. 영상에 달린 댓글을 보니 사회 초년병의 현실을 디테일하게 잘 표현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국내에 인턴이 일반적이지 않던 시기에 취업한 세대라서 이해도가 떨어지는 건가 싶었다.

 그래서 지금 인턴을 하는 젊은이들에게 물어봤다. 즉각 자신들의 얘기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젊은 패기’를 내세운 주현영의 멘트는 면접으로 치면 ‘자기소개’에 해당한다고 알려줬다. 자신을 표현하는 ‘캐치프레이즈’를 먼저 던져놓고 소개해야 좋은 점수를 받는다는 게 정설이라고 한다. 주현영이 앵커역을 맡은 안영미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지는 건 면접에서 어색한 분위기를 깨는 일종의 아이스 브레이킹 기술로 전수된단다.

 '인턴 주현영'이 드러낸 구직 실상

 인턴들은 이구동성으로 주현영이 보여준 모든 디테일이 학교나 취업 동아리 등에서 배운 대로라고 했다. 주현영은 잘 모르는 상황에 대해 당황하면서도 끝까지 답변하려 애썼다. 한 인턴은 “면접에서 모른다고 답하는 순간 탈락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 횡설수설하더라도 끝까지 얘기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취업준비생들 사이에 있다”고 귀띔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또박또박 말하는 모습도 "총명한 이미지를 심어야 한다"는 취업 강의 조언이 배경이었다. 주현영은 우리네 아들딸이 처한 구직 전쟁의 상징인 셈이다.

 취준생들이 실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모범 답안’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면, 채용하는 기성세대가 원인을 제공하는지 돌아봐야 할 것 같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기존 질서대로만 사업하다가는 도태되기에 십상이다. 그런데도 구직자들이 ‘똑똑해 보이는’ 판박이 모습에 집착한다면 개인의 다채로움과 이를 통해 발현될 창조적 에너지를 기업이 무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답하지 못하는 장면 역시 해당 직장의 경직성에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처음 실무를 경험하는 인턴은 실수를 통해 경험을 쌓으며 발전할 수 있는 기간이다. 인턴을 하고 있는 한 젊은이는 “직종에 따라 다르지만 처음 하는 일이라 여쭤보면 ‘알아서 해야 한다’는 답을 듣기도 하고, 간단한 실수에도 큰 질책을 받아 그만두는 인턴들도 많다”고 전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완벽하게 일을 해내지 못하면 정규직 취업에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부담감이 크다고 한다.

 취업 전선에서도 팔방미인 요구

 주현영에게 이목이 쏠리는 현상을 바라보는 인턴들의 심정은 엇갈렸다. 구직에 필수적이라고 회자된 모든 노력을 보여준 주현영이 결국 울먹이며 무대를 뛰쳐나가는 모습이 너무 리얼해 불편했다는 반응이 한가지다. 이런 모습이 재밋거리로 소비되지 않을까 당혹스러워도 했다. 한편에선 이번 기회에 취준생이 겪는 애로점이 공론화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반응이 나왔다. 일도 잘하고 성격도 활발하고 열정도 넘치고 SNS도 잘하는 멀티플레이어를 선호하는 것 같은 채용 문화가 얼마나 큰 부담인지 사회가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얘기다.

 요즘 젊은이들은 인턴을 ‘금턴’이라고 부른다. 인턴을 한 번도 하지 않으면 취직이 쉽지 않다고 알려져 있지만, 인턴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채용형 인턴이 아니라 정규직 채용과 바로 연계되지 않은 체험형 인턴마저도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다. 수시와 정시뿐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한 전형으로 짜인 대입을 치르면서 내신과 학생부, 수능까지 다 챙겨야 했던 젊은 세대는 취업 전선에서도 팔방미인이 되길 요구받고 있다.

 고통 덜어주는 채용문화 됐으면

 경쟁을 없애는 건 불가능하지만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의 고통을 덜어줄 여지는 있다. 안영미의 까다로운 물음에 주현영은 “좋은 질문?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라고 답했다. 인턴들은 “나이 든 세대에겐 늘 공손해야 한다고 배웠다”고 했다. 인턴은 봉사하는 게 아니라 선발돼 급여를 받는 예비 직장인이다. 우선 모든 대화나 지시, 충고에 “감사합니다~”라고 답할 필요는 없다는 말부터 해주자. 주현영 영상을 찾다가 과거 SNL에서 취업난을 다룬 다른 영상도 보게 됐다. 면접관이 탈락한 지원자에게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도 있잖아”라고 위로를 건넸다. 그러자 유명 개그맨이 분한 구직자는 소리쳤다. “아프면 그게 환자지, 어떻게 청춘이에요!”

김성탁 논설위원

김성탁 논설위원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