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바지 피렌체男에 쇼크…세계 1위 韓명품백 제조사의 시작

중앙일보

입력 2021.09.23 15:00

업데이트 2021.09.24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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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박은관 시몬느 회장이 경기도 의왕시 본사에 설치된 가방을 형상화한 작품 앞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박은관 시몬느 회장이 경기도 의왕시 본사에 설치된 가방을 형상화한 작품 앞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1979년. 아버지는 “무슨 사내 녀석이 여자들이나 드는 손가방 회사를 가겠단 거냐”며 못마땅해했다. 하지만 갓 대학을 졸업한 박은관은 “부모님 보살핌에서 벗어나서 사회를 배우고 싶다. 수출회사에 가서 뉴욕과 피렌체를 내 눈으로 꼭 좀 보게 해달라”고 설득해 핸드백 중소기업인 ㈜청산에 입사했다.

보라색 바지를 입은 남자들 

1980년 4월 첫 출장으로 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그는 ‘쇼크’를 받고 말았다. 남자들이 빨갛고 노랗고 보라색의 바지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게 아닌가. 설명하기 어려운 설렘에 무려 6가지 색의 바지와 11가지 색의 티셔츠를 싸 들고 귀국했다.

그 후 뉴욕·밀라노·파리 등에서 ‘5만 원짜리 핸드백이 아니라 300만 원짜리 명품백이란 게 있다’는 데 또 한 번 놀란 그는 결국 1987년 서울 영등포에 ‘시몬느’를 창업하고 직접 명품 핸드백을 만들기 시작했다.

코치·마이클코어스 핸드백, 한국이 만든다  

여름의 녹음보다 푸른 하늘이 눈부신 9월. 경기도 의왕시 시몬느 본사에서 만난 박은관(66) 회장은 “솔직히 이렇게 오래 (핸드백을)할지 몰랐다”며 빙그레 웃었다.

회사 설립 34년. 더러 침대회사 이름과 헷갈리기도 하지만 시몬느는 세계 1위 명품 핸드백 제조회사가 됐다. DKNY·코치·마이클코어스·마크제이콥스를 비롯해 폴로랄프로렌, 토리버치 등 20여개 명품 브랜드가 고객사다. 무엇보다 고객사의 요구대로 생산하는 게 아니라, 제품 기획부터 개발·제작까지 직접 참여하는 제조업자 개발생산(ODM) 방식이다. 지난 40여년간 만든 핸드백 견본(스타일)만 22만개다. 그 결과 세계 명품백 ODM 시장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은 약 10%, 북미 점유율은 30%에 육박한다.

숫자로 보는 시몬느.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숫자로 보는 시몬느.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시몬느 덕에 다리 뻗고 잡니다”

몇 해 전, 30년 고객인 DKNY의 최고경영자(CEO)에게 박 회장이 ‘시몬느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돌아온 답은 “Stretch my legs and Goodnight sleep(두 다리 쭉 뻗고 편히 자게 해주니까)”였다. 품질과 납기일만큼은 한 번도 져버리지 않았던 데 대한 신뢰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자본금 3000만원으로 시작한 회사는 2019년 매출 1조원을 넘겼다. 글로벌 브랜드들과 동등한 협업관계를 이룬 덕에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직전 5년 평균 영업이익률은 16.3%로, 패션제조업 평균치(4%대)의 3~4배 수준이다.

여성에게 핸드백은 어떤 의미일까

코로나 사태로 지난해와 올해 매출은 줄었지만, 내년부터는 예년 평균을 회복한 뒤 다시 성장세를 이어갈 전망이다. 명품 시장이 가진 특징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 홍콩은 유독 에르메스·샤넬·루이비통 같은 최고급 명품을 선호해요. 하지만 이미 오랜 세월 명품을 경험해 본 유럽이나 실용적인 문화가 강한 미국에선 오히려 합리적 가격대의 브랜드가 꾸준히 성장하고 있어요.” 특히 중국과 동남아시아·러시아·브라질 등 제3세계 국가에서 시몬느의 주요 고객사인 소위 ‘어포더블 명품(affordable luxury)’의 성장률이 매우 높다.

박은관 시몬느 회장은 명품 핸드백이 사회적·경제적·문화적 계층을 구분짓는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삶의 여정을 함께하는 친구같은 존재도 될 수 있다고 해석했다. 임현동 기자

박은관 시몬느 회장은 명품 핸드백이 사회적·경제적·문화적 계층을 구분짓는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삶의 여정을 함께하는 친구같은 존재도 될 수 있다고 해석했다. 임현동 기자

명품 중에서도 핸드백은 특별하다. 흔히 명품백을 드는 심리를 과시욕으로 치부하지만 박 회장은 핸드백이 여성들에게 삶의 자취와 여정을 기록하는 분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자고 여자고 힘들고 고생했을 때 함께 했던 물건은 쉽게 못 버리잖아요. 늘 옆에 들고 다닐 수 있는 핸드백은 자신의 희로애락을 담는 분신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명품백에 남다른 의미를 주는 것 아닐까요.”

한글사랑으로 이어진 세계1위 자부심

시몬느의 현재 입지는 탄탄해 보인다. 하지만 계절마다 해마다 트렌드가 바뀌는 게 패션 업계다. 박 회장은 직원들에게 ‘새로운 과거, 오래된 미래’란 슬로건을 내걸었다.

“옛날의 좋았던 경험만 강조하면 아집이 될 수 있어요. 새로운 시각으로 과거를 채우고, 계승·발전시킬 유산만 추려내 미래로 가자는 뜻이죠.”

이를 위해 매년 사내 50·60대 장인들과 젊은 캐드(컴퓨터를 이용한 설계) 디자이너, 산업공학 및 엔지니어링 전공자들이 함께 일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디지털에 취약한 장인들과 소재 및 제조를 배우려는 젊은 세대를 연결해 서로 역량을 전수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박은관 시몬느 회장이 『 핸드백 용어사전 』을 펼쳐보이고 있다. 임현동 기자

박은관 시몬느 회장이 『 핸드백 용어사전 』을 펼쳐보이고 있다. 임현동 기자

지난 2017년엔『핸드백 용어사전』을 펴냈다. 제조 현장에서 아직도 ‘구치에 후다 달아라(가방 입구에 덮개를 달아라)’ 식으로 도제식 일본어가 쓰이는 것을 보고 결심한 일이다. 기리메는 단면, 우라는 안감, 쓰나기는 맞박기…2년 반에 걸쳐 1006개 용어를 정리했고 이제 캄보디아·인도네시아·베트남 등 시몬느 공장에선 모두 한국어로 작업한다. 박 회장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한글날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지금은 사재를 들여 미국 미네소타주 콩코르디아 대학의 언어마을에 한국어 마을을 짓고 있다.

도쿄는 지는 해, 서울은 빛나는 해

이런 노력이 헛되지 않은 건 크게 높아진 한국 패션의 위상이다. 패션은 기술력도 중요하지만 나라의 경제적 수준, 문화적 유산, 소비자의 안목 등이 더해져야 하고, 이런 것들이 세계에 ‘알려져’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동안 한국이 일본에 비해 손해를 본 게 바로 이 부분이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변했다. 삼성 등 글로벌 기업의 파워, 월드컵 등 국제 행사로 알려진 5000년 문화, 김연아 선수 등이 증명한 예술성, 전 세계 패션업계마다 포진한 한국인 등 여러 요소가 어우러져 ‘패션 강국’의 토양이 무르익었다.

박은관 시몬느 회장은 한국이 이제 세계적으로도 패션 강국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임현동 기자

박은관 시몬느 회장은 한국이 이제 세계적으로도 패션 강국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임현동 기자

박 회장은 “글로벌 패션시계를 태양으로 표현하면 상하이가 아침 10시, 서울이 정오, 도쿄가 오후 3시로 서울의 해가 가장 높이 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요즘 명품 브랜드가 아시아에서 론칭하는 순서가 한국·상하이·도쿄·홍콩이다. 서울에서 뜨면 2~3주 안에 다른 국가에서 다 뜬다고 한다”고 전했다. 서울이 아시아뿐 아니라 글로벌 브랜드의 원천이 될 때가 됐다는 얘기다.

“나에게 핸드백이란…” 

박 회장은 한국에서 글로벌 명품 브랜드가 나오는 ‘오래된 미래’를 위해 본인 세대에는 꾸준히 제조에 힘을 쏟을 생각이다. 오는 11월 유가증권시장에 기업공개(IPO)를 결심한 것도 핸드백 제조에 있어서만큼은 세계 최고 기업이라는 자부심을 후배들, 직원들에게 주고 싶어서다. 같은 맥락에서 미국의 유명 패션스쿨인 파슨스나 FIT와 함께 서울에 장인교육기관을 세울 준비도 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작은 산업이죠. 그래도 그 작은 캔버스에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 칠하고 싶은 색을 마음껏 펼치게 해 준 게 핸드백이에요. 무엇보다 수많은 시행착오로 세상을 배우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 줬으니 고마워요. 제가 꽃봉오리를 맺는 것까지 하고 나면 그 다음 후배 세대는 꽃이 만개하고 열매를 맺는 모습을 보게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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