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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억들고 은퇴 36세 "돈만 쫓으면 회사 노예서 재테크 노예 된다"[오늘, 퇴사합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한국 사회에 파이어(FIRE)족이 상륙했다. ‘경제적 독립, 조기 은퇴(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의 앞글자를 딴 파이어족은 경제적 자립을 통해 40대 초반 전후에 은퇴한 이들을 일컫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의 젊은 고학력·고소득 계층을 중심으로 퍼졌다.

자본 소득에 비해 뒤처지는 노동 가치, 불안정한 고용과 사라진 평생 직장, 길어진 수명 등이 MZ세대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에도 파이어족의 등장을 부추기고 있다. 중앙일보는 불안한 시대에 조기 은퇴를 택한 한국판 파이어족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오늘, 퇴사합니다]②4억 들고 조기은퇴한 여신욱씨…"출ㆍ퇴근 없는 내 시간을 산다" 

삼성전자 디자이너 출신 여신욱씨는 36살에 조기 은퇴했다. 그는 “연봉과 커리어를 잃었지만, 가족과 건강, 그리고 반려견과 산책하는 시간을 얻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사진 염지현 기자.

삼성전자 디자이너 출신 여신욱씨는 36살에 조기 은퇴했다. 그는 “연봉과 커리어를 잃었지만, 가족과 건강, 그리고 반려견과 산책하는 시간을 얻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사진 염지현 기자.

양팔에 워런 버핏 등 유명 투자전문가의 격언을 새긴 타투(문신)와 휴양지에서 입을 법한 화려한 무늬의 반바지. 이달 초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 인근 커피숍에서 만난 여신욱(39)씨의 첫인상이다. 삼성전자와 현대카드, SAP 등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했던 그는 36살에 파이어족이 됐다. 일반 회사에서 보기 힘든 자유로운 차림이 퇴사 후 180도 바뀐 그의 삶을 보여준다.

여씨는 “연봉과 커리어를 포기한 대신 건강과 반려견과 산책하는 등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는 조기 은퇴 경험을 담은 책『서른여섯, 은퇴하기 좋은 나이』를 지난해 펴냈다. 30대에 파이어족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다음은 여씨와의 일문일답.

서른여섯에 은퇴한 이유는.
“인생을 리디자인(재설계)하고 싶다는 욕구가 컸다. (개인적으로) 회사 업무는 만족스러웠지만, 야근 등으로 몸이 상했다. 특히 맞벌이 부부라 (우리가 출근하면) 매일 10시간 이상 집에 홀로 남겨진 반려견에게 미안한 이유도 컸다. 그동안 돈을 받고 ‘내 시간’을 회사에 제공했다면 벌었던 돈으로 ‘내 시간’을 사용해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때가 서른여섯살이었다”
은퇴자금은.
“4억원이 전부다. 하지만 주식 투자로 과거 연봉 수준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만일 수십억원의 노후 생활비를 모두 마련한 뒤 은퇴하겠다고 생각했다면 시도조차 못 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자금이 있어야 은퇴가 가능할까.  
“연간 생활비와 투자 수익률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예컨대 연간 생활비가 3600만원이라고 한다면 경제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 필요한 시드머니(자본금)는 3억6000만원이 된다. 연평균 투자 수익률이 10% 나온다고 가정했을 때다. 수익률을 낮출수록 필요한 자본금은 많아진다. 확실한 건 들어온 돈 보다 나가는 돈을 줄이면 된다. 경기도 판교에 살다 제주도로 이사 온 것도 주거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서다. 제주도 아파트 115㎡(약 35평) 기준 평균 임대료는 보증금은 1000만~1500만원에 연세(1년 치 임대료)는 1000만~1500만원 수준이다. 수도권에 살 때보다 부담이 적다.”
파이어족이 된 이후 어려운 점은.  
“지난해 초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터졌을 때 주식 계좌 손실률이 마이너스 40%에 달했다. 순식간에 운용 자금의 절반을 날렸다. 코로나19 여파로 당시 보유했던 조선업 종목 주가가 급락한 영향이 컸다. 하지만 기업 가치보다 대외 요인에 의한 하락이라 주가가 회복할 때까지 버티기로 했다. 대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시각디자인 전공을 살려 제주도 내 대학교 시간강사를 맡았고, 온라인 플랫폼에서 주식 투자 강의도 했다. 회사에 다녔다면 몰랐을 ‘생존능력(?)’에 앞으로도 출·퇴근 없는 삶을 유지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다. 주식 계좌는 올해 들어 대부분 손실을 회복한 뒤 투자 원금의 2배 정도 수익을 거뒀다.”
여신욱씨는 파이어족이 된 이후 아침마다 반려견과 산책하는 시간을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꼽았다. 사진 여신욱 제공.

여신욱씨는 파이어족이 된 이후 아침마다 반려견과 산책하는 시간을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꼽았다. 사진 여신욱 제공.

파이어족으로 살아보니.
“하루를 의도한 대로 살 수 있다. 오전 6시에 일어나면 요가나 헬스 등 운동을 한 뒤 아내와 함께 강아지 산책을 시킨다. 서귀포 중문 관광단지에서 바닷가 쪽으로 걷다 보면 인적이 드문 올레길이 나오는 데 매일 이곳을 걷는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도전이나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포기할지 아는 사람이 파이어족이라고 생각한다. (내 경우엔) 연봉과 커리어를 포기한 대신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을 얻은 셈이다.”
파이어족을 꿈꾸는 2030을 위한 팁이 있다면.
“재테크나 파이프라인 구축이 파이어족의 핵심이 아니다. 은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돈 버는 방법만 쫓다 보면 회사 노예에서 재테크의 노예로, 주인만 바뀔 뿐이다. 이보다 남의 기준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삶을 개척하겠다는 ‘의지’가 더 중요하다. (내 경우도) 제주도로 내려온 뒤 출·퇴근이 없는 삶을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다. 주식투자는 더 깊게 공부하고, 이후 투자 관련 콘텐트로 온라인 강의를 시작했고, 책을 내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부수적인 수입이 점점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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