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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증강 현실 '오징어 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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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넷플릭스 드마라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

넷플릭스 드마라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

추석 연휴의 화제 중 하나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었습니다. 잔혹함이 주는 고통 때문에 중도 하차를 고려한 적이 있었지만, 결말에 대한 궁금증에 이끌려 완주했습니다. 마냥 허황한 공상으로만 볼 수 없게 하는, 우리의 실상을 닮은 구석이 있었습니다. 물론 과도한 ‘증강현실’이긴 합니다(※아래의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① 456억원: 게임 총상금이 456억원입니다. 왜 450이나 500처럼 끝단위가 깔끔한 수가 아닌지 본 사람은 압니다. 게임 참가자는 혼자 독식하게 되는지, 끝까지 버틴 여러 명이 나누게 되는지 모릅니다. 두셋 또는 서넛이 나누게 될 것으로 짐작하는 참가자들의 대사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나온 비슷한 종류의 창작물에 비해 상금 액수가 단연 압권입니다. 부자의 개념이 달라진 현실을 반영한 듯합니다. 서울에 수십억원짜리 아파트가 즐비합니다. 1등 상금 몇십억원의 로또가 초라해졌습니다. 주식과 코인, 스타트업 창업으로 수백억원을 가진 자산가가 부쩍 늘었습니다. 팔자 고치는 돈의 규모를 드라마를 통해 다시금 확인합니다.

② 다수결 원칙: 참가자들이 다수결로 중단을 결정하면 게임의 연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손 털고 집에 가면 그만입니다. 처음에 한 차례 그런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모두가 까맣게 잊은 듯 앞만 보고 갑니다. 위험한 일방적 폭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것은 다수의 의지뿐인데, 합리적 다수가 결집하지 않습니다. 결국 절대다수가 목숨을 건 비인간적 경쟁을 ‘승인’한 게 됩니다. 현실에서도 ‘다수의 뜻’이라는 통제장치가 있지만 제대로 쓰일 때는 드뭅니다. 외려 폭정에 ‘다수의 동의’라는 면죄부를 부여하는 기제로 작동합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제도의 위태로움을 생각하게 됩니다.

③ 전략적 편 먹기: 편을 갈라 하는 게임이 등장합니다. 그 전에 이미 참가자들이 끼리끼리 모였습니다. “원래 사람은 믿을 만해서 믿는 게 아니다”는 대사가 흐릅니다. 좋아서 같은 편 하자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을 현실에서는 고상하게 ‘전략적 선택’이라고 부릅니다. 뜻이 통해서가 아니라 필요 때문에 뭉치고 밀어주는 것을 그렇게 불러왔습니다. 연휴 중에도 선거판은 바삐 움직였습니다. 여권의 두 선두주자는 호남 지역에서 왜 자기랑 편을 먹어야 하는지를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야권에서는 편으로 위장한 적이 진영을 교란한다는 ‘역선택’ 논란이 여전히 계속됩니다. 영혼 없는 편싸움은 현실에서도 드라마틱합니다.

④ 게임의 룰: “부동산 개발업이 원래 그런 거다.” 김종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 문장으로 요약한 성남시 대장동 의혹 당사자들의 해명입니다. 그들은 아파트 시행업이 ‘쪽박’을 각오하고 하는 사업인데, 운이 좋아 ‘대박’이 났을 뿐이라고 합니다. ‘게임의 룰’에 충실했다고 말합니다. 도박판 같은 이런 부동산 개발 게임이 과연 국리민복에 부합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동시에 정말 게임의 규칙은 원칙대로 지켜진 것이냐는 물음도 나옵니다. ‘오징어 게임’ 속 설계자는 공정하고 평등한 규칙을 강조하지만, 특정 참가자에게 게임 정보를 건네는 내부자가 나옵니다.

⑤ 따로 보는 OTT: 명절에 맞춰 극장들이 대작 명화를 개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중국 무술영화나 훈훈한 ‘가족영화’가 연휴에 맞춰 등장했습니다. TV 앞에 온 가족이 모여 않게 하는 명절용 특별 프로그램도 있었습니다. 어느덧 가족도 각기 취향과 ‘진도’에 맞춰 스마트 기기를 들고 시간을 보내는 게 대세가 됐습니다.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가 세태를 바꾼 것인지, 달라진 가족 문화가 OTT의 융성을 만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둘 다인 것 같기도 합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의 비정한 경쟁이 펼쳐지는 현실에 극적 상상력을 가미한 드라마가 명절 연휴의 최고 흥행작이 됐습니다. W.C.(위드 코로나) 2년 가을의 스산한 풍경입니다.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