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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의생' 이익준 실제 모델 "어린이날 이식 사연, 100% 실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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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실제 경험하는 것의 아주 순한 맛이지요. 현실에서는 훨씬 극적인 일들을 많이 겪습니다.”

홍근 이대목동병원 간담췌외과 교수 인터뷰

최근 종영한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이하 슬의생)에서 이익준(조정석)의 실제 모델이 된 홍근(48·사진) 이대목동병원 간담췌외과 교수(장기이식센터장)는 지난 16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홍 교수는 슬의생이 현실 의사도 공감할 만큼 섬세한 리얼리티를 담아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17년 10월 드라마 기획 단계에서 제작진을 만난 홍 교수는 환자와 소통하며 쌓은 경험담을 늘어놨다. 입만 열면 에피소드가 쏟아졌다. 홍 작가로도 불렸다. 그가 실제 겪은 사연이 드라마에 많이 반영됐다. 홍 교수는 “새 간이식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환자 한 명 한 명을 더 신경 쓰던 때였다. 환자와 많은 걸 공유하다 보니 작가에게 할 얘기가 많더라”며 “주인공 익준이가 그렇게 나왔고, 드라마 메인 테마가 이식으로 가게 된 데에도 영향이 있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이대목동병원 홍근 간담췌외과 교수. 사진 이화의료원 제공

이대목동병원 홍근 간담췌외과 교수. 사진 이화의료원 제공

슬의생 명장면으로 꼽히는 어린이날 에피소드도 홍 교수 얘기다. 지난해 방송된 시즌 1에서 어린이날 교통사고로 뇌사에 빠져 장기 기증을 하게 된 환자의 사연이 나왔다. 장기를 구득(求得)하러 온 다른 병원 의료진에 익준은 10분만 기다려 달라고 한 뒤 수술을 자정 이후로 미룬다. 환자의 자녀가 어린이날마다 아빠 때문에 울면서 보낼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극 중에선 의사가 제안하지만 홍 교수가 펠로우(전임의) 시절 보호자가 실제 그렇게 요청했다고 한다.

“1년에 70건 가까이 다른 병원으로 장기를 구득하러 다니던 시절이라 그저 빨리 가서 빨리 오는 것을 목표로 공장 부속품처럼 지내던 때였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다 호출받고 해당 병원에 가게 됐는데 코디네이터가 12시는 넘겨달라는 거예요. 자초지종을 듣고 숙연해졌습니다. 장기 적출을 하고 나오는데, 그때야 수술장 밖에서 울고 있는 보호자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기증자도 누군가의 사랑받는 가족이란 걸 다시 깨닫고 환자를 배려해야겠다는 초심을 다잡게 된 계기입니다.”

홍 교수는 “의사는 질병을 치료하지만 그 과정에서 환자와 가족의 마음을 배려해야 한다. 교과서로는 배울 수 없는 환자, 보호자의 마음을 간접 경험할 수 있는 드라마”라며 “살린, 살리지 못한 환자와 보호자들을 생각나게 했다”고 말했다.

홍근 교수가 간이식술을 진행한 50대 여성 환자와 찍은 사진. 이 환자는 간경변증이 심한 상태에서 젊은 아들에게 간 기증을 받아 현재 회복한 상태다. 사진 이화의료원 제공

홍근 교수가 간이식술을 진행한 50대 여성 환자와 찍은 사진. 이 환자는 간경변증이 심한 상태에서 젊은 아들에게 간 기증을 받아 현재 회복한 상태다. 사진 이화의료원 제공

드라마에서 간암 투병 중인 딸에게 간을 주고 싶은데 지방간 때문에 어렵다는 의료진에 “왜 수술 안 해 주냐”며 역정 내는 아버지가 혹독하게 살을 빼고 나타나 이식에 성공한 얘기도 감동을 전했다. 현실에선 지방간보다 더한 사유로 이식이 쉽지 않았던 65세 아버지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간을 공여했다고 한다.

홍 교수가 2년 전 겪은 75세 최고령 생체 간이식 사례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사연이다. 기증자가 60세 이상 고령일 땐 이식이 어려워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런데 40대 아들을 살리고 싶은 아버지 간곡한 호소가 홍 교수를 흔들었다. “죽어도 좋으니 젊은 아들은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지에 모험과도 같은 결단을 내렸다. 홍 교수는 “생체 이식이 전체 이식의 60~70%를 차지한다. 기증이 잘못되면 우리 병원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식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어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면서 “검사해보니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어 기증자 의지를 믿고 진행했다”고 말했다. 수술 이후 기증자가 중환자실에 일주일 넘게 있었다고 한다. 그 기간 홍 교수 살이 쏙 빠졌지만, 부자는 다행히 건강하게 퇴원했다.

딸들한테 간 이식을 두 차례 받고도 술을 못 끊은 환자에 익준이 매우 화내며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있는 일이라고 한다. 홍 교수는 “외래에서 유일하게 화낼 때가 이식한 환자 분이 술 마시고 올 경우”라고 말했다.

일본에서 오랜 기간 체류하다 온 30대 남성 환자가 간경변증으로 뇌사자 간을 이식받고 회복한 이후 홍근 교수와 찍은 사진. 환자는 '슬의생' 모델이 된 홍 교수에게 수술받은 것을 친구들이 신기해한다며 기념 촬영을 요청했다고 한다. 사진 이화의료원 제공

일본에서 오랜 기간 체류하다 온 30대 남성 환자가 간경변증으로 뇌사자 간을 이식받고 회복한 이후 홍근 교수와 찍은 사진. 환자는 '슬의생' 모델이 된 홍 교수에게 수술받은 것을 친구들이 신기해한다며 기념 촬영을 요청했다고 한다. 사진 이화의료원 제공

익준과의 싱크로율에 대해 묻자 “방송을 본 후배들이 ‘교수님이 실제 하는 얘기랑 똑같다’라고 한다. 익준이 그러듯 환자나 보호자에게 찾아가 사는 얘기도 하고 인간적인 소통을 많이 하려 노력한다”고 말하며 웃었다. 사람 대하는 게 좋아 의사가 됐고 환자가 건강해지는 모습을 보는 게 기쁨이라고 홍 교수는 말한다. 그에게 직장 병원은 어떤 곳이냐 물었더니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홍 교수는 “수혜자가 기증을 받고 얼마나 좋아지는지, 보호자가 얼마나 감사해 하는지가 꼭 담겼으면 했다”며 “극 중 의료진이 수혜자에게 ‘저한테 감사하지 말라, 기증자와 기증할 수 있게 동의해 준 보호자에게 하라’ 식의 대사도 그래서 나왔다”고 말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이익준 역할의 조정석. 사진 tvN 홈페이지 캡처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이익준 역할의 조정석. 사진 tvN 홈페이지 캡처

이런 메시지는 선한 영향력을 전파했다.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에 따르면 올해 1~8월 장기, 인체 조직을 기증하겠다고 희망한 등록자는 10만8002명으로 지난해 동기간(7만151명)보다 54% 증가했다. 특히 올해 등록자의 절반 이상이 7~8월에 몰려 있는데 지난 6월부터 방송한 슬의생 영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관계 기관들은 설명한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KODA·코다) 관계자는 “장기 기증 에피소드가 반영될 때면 방송이 끝난 밤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희망자가 눈에 띄게 늘었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드라마 끝나고 밤사이 온라인 장기기증 서약이 400건 올라온 적도 있다더라. 드라마를 통해 장기 이식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뀐 것 같다. 실제 겪는 일을 최대한 그대로 보여줬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는데, 잘 만들어진 드라마 한편의 영향력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장기 기증을 간절히 기다리는 환자가 주변에 많이 있다”며 “관심이 계속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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