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137)
200ml에 8만 8000원. 소주 한 병보다 적은 용량의 한국 첫 싱글몰트 위스키 ‘기원’의 가격이다. 보통 위스키 용량 700ml로 환산하면 30만 8000원. 글렌드로낙 21년, 글렌고인 21년, 맥캘란 18년 등을 살 수 있는 가격이다. 과연 1년 남짓 숙성한 한국산 싱글몰트 위스키에 18년 이상 고숙성 스카치 위스키라는 기회비용을 치를 만 할까.
맛과 향으로만 판단한다면, 쓰리소사이어티스 증류소의 ‘기원’을 사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잔에 따라 향을 맡아보니 위스키 스피릿 향만 가득했다. 1년 2개월 동안 버진 오크에서 숙성하는 것만으로 위스키다운 ‘숙성감’을 찾기는 힘들었다. 맛에서도 이 스피릿 맛이 분명하다. 맥아의 단맛과 스파이시한 느낌이 강하고, 풀잎향도 많이 담겨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피니시에서 스피릿 느낌이 많이 날아가고 오크 바닐라, 옅은 복숭아 계열의 과일맛이 느껴진다는 점. 위스키로 변해가는 스피릿의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찾아볼 수 있었다.
맛에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1년 정도 숙성한 위스키는 원래 이렇다. 일본 카노스케 증류소의 3년 숙성 싱글몰트 위스키, 사부로마루 증류소와 나가하마 증류소의 3~4년 숙성한 블렌디드 몰트 위스키를 최근 마셔봤다. 쓰리소사이어티스 증류소의 기원처럼 스피릿 맛이 많이 난다. 어떻게 하면 이 맛을 교묘하게 지울 수 있는지 노력한 것이 느껴졌다. ‘스카치 위스키’가 최소 3년 이상 숙성을 내세우는 이유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형편없지만 국산 싱글몰트 위스키를 사볼 만한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한국산 위스키에 대한 응원이다. 최근 몇 년, 일본에서 위스키 증류소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들도 3년 미만 숙성한 위스키를 발매했다. 숙성기간이 짧다고 가격도 싸진 않았다. 하지만 위스키 팬들은 응원하는 마음으로 술을 샀다. 검증된 타국 위스키도 좋지만, 새로운 자국 위스키와 함께하겠다는 의지다. 위스키 증류소와 함께 역사를 써내려가는 즐거움도 있다.
위스키 숙성과정을 이해하는 데도 좋은 교재가 된다. 숙성이 덜 된 위스키를 마셔보거나 구입할 수 있는 기회는 잘 없다. ‘숙성의 마법’이라고도 불리는 위스키가 숙성을 통해 어떻게 변해가는지 알면, 위스키에 대한 이해가 커진다. 1년, 2년, 3년…. 시간과 함께 변해가는 위스키를 맛보는 건 정말 재미있는 일이다.
그래도 기원의 가격은 괘씸하다. 첫 위스키를 비싸게 팔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맛을 보여주는 행사를 진행했다면 어땠을까. 여러 가지 행사를 고민했겠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어려워졌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쓰리소사이어티스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다. 앞으로 3년, 5년, 10년, 20년이 흘렀을 때 제대로 숙성된 위스키 맛을 보여주는 것. 여기에 한국산 몰트와 한국산 오크통 등 한국적인 것이 더해지면, 한국은 물론 세계에서 주목받는 증류소가 될 수 있다. 오늘 마신 기원 한 잔이 역사적인 한 잔으로 기록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