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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사는 노인들의 '잇템'…직접 쓴 소원성취함 열자 '왈칵'

중앙일보

입력

지난 9일 서울노원북부자활센터 소속의 사회복지사가 소원 성취를 신청한 어르신의 자택에 방문해 1차 면담을 진행하고 있다. 이가람 기자

지난 9일 서울노원북부자활센터 소속의 사회복지사가 소원 성취를 신청한 어르신의 자택에 방문해 1차 면담을 진행하고 있다. 이가람 기자

“인생을 정리하는 시점에서….”

서울 노원구 월계2동 주민센터에 설치된 ‘소원성취함’을 열자 김순자(83·가명) 할머니의 소원이 적힌 종이가 세상에 나왔다. 팔십이 넘은 어르신의 애절한 사연이 담긴 ‘꿈이룸 신청서’였다. 임대아파트에 홀로 살고 있다는 김 할머니가 “심리적으로 작은 위안과 안정을 찾고 싶다”며 가지고 싶은 것으로 꼽은 건 다름 아닌 ‘수의’(壽衣)였다.

홀로 사는 어르신들이 꼽은 소원 ‘이것’

서울 노원구 중계 2·3동 주민센터에 설치된 소원성취함의 모습. 독자 제공

서울 노원구 중계 2·3동 주민센터에 설치된 소원성취함의 모습. 독자 제공

서울 노원구 전역에서 모인 이러한 ‘꿈이룸 신청서’에는 각양각색의 사연과 소원들이 적혀있었다. 지역 내 저소득 독거노인들의 못 이룬 꿈을 이뤄주고자 노원구와 서울노원북부자활센터(자활센터)는 지난 4월부터 소원을 모았다. 어르신들의 고립감을 해소하고 삶의 희망을 북돋기 위한 취지였다. 홀로 사는 만 70세 이상의 어르신 81명이 주민센터에 설치된 ‘소원성취함’에 ▶가보고 싶은 곳 ▶가지고 싶은 것 ▶해보고 싶은 것 중에서 이루고 싶은 소원을 하나씩 적어냈다.

호적을 늦게 올려 원래 나이는 91살이 넘어간다는 김 할머니는 ‘수의’ 옆에 괄호를 치고 ‘사후 대비 용품’이라고 적어놓았다. 신청 사유에 김 할머니는 “처녀 적에 원치 않게 아들을 얻어 채소 행상을 하며 어렵게 키워냈다”며 “성인이 된 후에 생활고를 비관한 아들이 집을 나갔고, 한 번 돈을 달라고 찾아와 생떼를 부린 뒤 연락이 끊긴 지 40년”이라고 자신의 가정사를 설명했다.

이어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서 인생을 살아오며 생활고 속에서 회의감과 우울감으로 힘들었다”며 “단기 기억상실과 난청, 치매 초기 증상으로 이제는 건강에 자신이 없다”고 했다. 김 할머니는 “이제 인생을 정리하는 시점에서 수의를 장만해 심리적으로 작은 위안과 안정을 찾고 싶다”고 글을 마무리했다.

“어려서 글 못 배워” “죽기 전에 세상구경”

지난 9일 서울노원북부자활센터 소속의 사회복지사가 소원 성취를 신청한 한 어르신의 자택을 방문해 1차 면담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소원 성취는 서울 노원구에 거주하는 만 70세 이상 독거노인 중 기초생활보장수급자, 차상위계층, 서울형기초보장수급자와 같은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독자 제공

지난 9일 서울노원북부자활센터 소속의 사회복지사가 소원 성취를 신청한 한 어르신의 자택을 방문해 1차 면담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소원 성취는 서울 노원구에 거주하는 만 70세 이상 독거노인 중 기초생활보장수급자, 차상위계층, 서울형기초보장수급자와 같은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독자 제공

소원성취함에선 “한글과 숫자 공부를 하고 싶다”는 소원도 나왔다. 이철순(가명·89) 할머니는 “어린 시절 여자라는 이유로 글을 배우지 못했다”며 “결혼해서도 한글을 배우고자 야학에 갔으나 배움을 계속하지 못해 읽을 줄은 알지만 쓰기가 어렵고 은행 일을 볼 때 숫자 단위 쓰기가 어렵다”고 했다. 이 할머니의 ‘꿈이룸 신청서’는 요양보호사가 대신 적어줬다.

소원 중에는 여행을 가고 싶다는 소원도 여럿 있었다. 국내 여행을 가고 싶다며 ‘무장애 여행지 희망’ 문구를 함께 적은 서영옥(가명·74) 할머니는 “원래 심한 지체 장애가 있어 거동이 불편한 상황에서 당뇨와 뇌경색으로 점점 몸이 안 좋아져 우울감이 크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홍제동에 어머니가 살아계실 적에는 사촌 언니와 왕래가 있었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그마저도 연락할 일이 없어 집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다”며 “코로나로 인해 복지관도 개방을 하지 않아 자력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지만 죽기 전에 세상구경을 하고 싶다”고 했다.

가지고 싶은 제품에 담긴 사연도 각양각색

어르신들이 꼽은 소원은 전자제품과 같은 ‘가지고 싶은 것’이 가장 많았다. 그러나 특정 제품이 있어야 하는 사연은 저마다 다양했다. 컴퓨터를 가지고 싶다는 최경자(가명·74) 할머니는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며느리는 집을 나가서 혼자 손자를 키우고 있다”며 “손자가 중학생이 되면서 컴퓨터가 필요하지만, 너무 큰돈이 들어서 못 사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김영철(가명·70) 할아버지는 “틀니를 한 상태에서 영양죽을 주로 먹어야 하는데 변변한 냉장고가 없어 상해서 버리는 경우가 많다”며 냉장고를 갖고 싶다고 했다. ‘환자용 전동침대’를 갖고 싶다는 권혜옥(가명·75) 할머니는 “허리 통증이 심해 집에서 기어 다니면서 생활하고 있다”며 “의료기기를 사고 싶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사지 못하고 있다”고 적었다.

어르신들은 ‘꿈이룸 신청서’에 “나이 많고 몸도 불편한 이 노인의 부탁을 들어주시면 참 행복할 것 같다” “나이 들어도 남의 신세는 지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드린다” 등의 문구를 함께 적으며 소원 성취에 간절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소원 성취로 희망 가지고, 고립감 해소되었으면 ”

노원구는 자활센터와 함께 당초 7월에 대상자를 모두 선정해 추석 전에 소원 성취를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일정이 연기됐다. 소원의 적절성·실현 가능성·예산 및 제반 환경 등을 심사해 지난 1일에서야 41명의 대상자 선정을 완료했다.

자활센터는 지난 2주간 대상자로 선정된 어르신의 자택을 직접 찾아 1차 면담을 진행했다. 독거노인의 생활환경 점검과 심리 상담 등이 함께 진행된 면담에선 코로나19로 인해 성취가 어려운 여행 등의 소원이 다른 소원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구와 자활센터는 추석 이후 진행될 2차 면담 때 물품 등을 전달하며 소원 성취를 진행할 예정이다.

김한빈 서울노원북부자활센터 사회복지사는 “홀로 사는 어르신들은 생을 마감하는 시기에 고독감으로 인해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있다”며 “소원 성취를 통해 삶에 희망도 드리고, 면담을 진행하면서 고립감을 해소하고 맞춤형 복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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